중국 선전시가 제작한 무용극 '영춘', 안동예당서 국내 최초 2회공연
영춘권 대가 '엽문'의 삶 소재, 영웅의 무용담보다 사람의 품격 담아
무술을 춤으로 승화, 고향 떠난 한 인간이 놓지 않았던 '가치' 이야기
칼끝은 번쩍이지 않는다. 피가 튀지도 않는다. 대신 손끝이 바람을 가르고, 발끝이 원을 그리며 무대를 돈다.
서로를 쓰러뜨리기 위한 몸짓 같지만, 춤이 끝날 무렵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승패가 아니라 사람의 품격이다.
중국 선전시가 제작한 무용극 '영춘(詠春)'이 지난달 31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웅부홀에서 선 보였다.
이 작품은 무술과 무용, 영화 제작과 현실,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이중 서사'를 통해 중국 무술과 도시 선전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려는 프로젝트다.
2022년 12월 초연 이후 중국 전역에서 흥행했고,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홍콩·런던·파리· 토론토 등 해외 투어에서도 매진 사례를 이어가며 중국 공연예술의 대표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른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1950년대. 전란과 혼란 속에서 엽문이 고향 포산(佛山)을 떠나 홍콩으로 건너가 영춘권을 지키고 전파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1990년대. 영화를 만드는 촬영팀이 엽문의 이야기를 촬영하면서 자신의 꿈과 삶을 되돌아보는 현대인의 이야기다.
무대에서는 회전무대와 조명, 영화 세트가 끊임없이 바뀌며 두 시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때문에 국내외 평론가들은 "무술극이면서 영화 제작 과정을 다룬 메타 드라마"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영춘권의 대가 엽문(葉問)의 삶을 소재로 삼았지만, 영웅의 무용담을 펼쳐 보이는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이 말하는 것은 무술보다 삶이고, 대결보다 이별이며, 승리보다 전승이다.
무대 위에서 엽문은 주먹으로 상대를 꺾는 무인이 아니라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자신의 문화를 끝내 놓지 않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야기는 광둥성 포산에서 시작된다. 전란은 삶의 터전을 흔들고, 엽문은 고향을 뒤로한 채 홍콩으로 향한다.
그가 짊어진 것은 재산도 명예도 아니다. '영춘당'이라는 작은 간판 하나다. 그 간판은 단순한 도장의 이름이 아니라 고향을 대신하는 기억이며, 사라져서는 안 될 전통의 무게다.
낯선 도시 홍콩에서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술가가 된다. 비어 있는 도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고독은 한 시대를 살아낸 모든 이주민의 초상이기도 하다.
무용극은 엽문의 여정을 다섯 개의 권법과의 만남으로 풀어낸다. 당랑권은 사마귀처럼 날카롭고, 팔괘장은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흐른다. 팔극권은 땅을 울리는 폭발적인 힘을 보여주고, 태극권은 물처럼 부드럽게 상대를 감싼다. 그리고 영춘권은 짧고 간결한 직선으로 응답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대결에 승패가 없다는 점이다. 각각의 권법은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삶의 철학이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다.
무술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니라 문화가 되고, 경쟁은 이해로 바뀐다. 세계 각국에서 이 작품이 호평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어는 달라도 몸짓은 국경을 넘는다.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의외로 싸움이 아니다. 병을 얻은 아내 영성과의 이별이다. 영성은 남편의 양복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하고, 엽문은 그 옷을 입고 홍콩으로 떠난다.
두 사람은 끝내 함께 길을 걷지 못하지만, 무대는 말없이 전한다. 사랑은 곁에 있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완성해 주는 기억이라는 것을.
실제 엽문은 화려한 언변으로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말은 지금도 영춘권의 정신으로 남아 있다.
"무덕(武德)은 무기(武技)보다 중요하다". 기술보다 인품이 앞서야 한다는 이 한마디는 무용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사람이 남는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영춘'은 무술극이면서도 평화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 속 엽문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주먹을 내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을 끝내기 위해 손을 뻗는다. 영춘권의 직선은 폭력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갈등을 멈추려는 절제의 선이 된다.
오늘의 세계 역시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속에 놓여 있다. 국경은 높아지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념과 문화로 충돌한다.
그런 시대에 '영춘'은 의외의 질문을 던진다. 가장 강한 무술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가장 오래 살아남는 문화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을 화려한 격투가 아닌 조용한 춤으로 들려준다.
무대의 마지막. '영춘당' 간판이 다시 세워지고 제자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한 사람은 늙어가지만 문화는 이어지고, 삶은 끝나도 정신은 전해진다. 그 순간 엽문은 비로소 한 명의 무술가를 넘어 시대를 건너 문화를 전한 스승이 된다.
무용극 '영춘'은 결국 주먹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향을 떠난 한 인간이 끝내 놓지 않았던 가치의 이야기이며, 이별 속에서도 이어진 사랑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싸움을 멈추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경지라는 사실을 춤으로 증명한 작품이다.
무대의 막은 내리지만, 관객의 마음속에서는 한 문장이 오래 맴돈다.
"진정한 강함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힘이 아니라, 끝내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품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