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운수대통하세요."말만 들어도 혈전(血栓)으로 막혀 있던 운세가 시원하게 풀릴 것 같다.당차고도 시원한 말이다.운세가 막힘없이 트여 천금의 재물을 한 번에 거머쥔 일확천금의 주인공들이 세상에 넘친다.평균수명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은"운수대통하세요"보다"건강 튼튼하세요"라는 말이 보약처럼 절실한 시대다.천금을 쥘 사주팔자도 건강이 받쳐줘야 누릴 수 있는 법이다.운세 이야기를 익숙한 광고 문구로 패러디하면"자기(남편)하기 나름이잖아요."가 아닐까.물론 삶과 인생이'하기 나름'인 만큼 운수가 대통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웃다가 울게 만드는 노년들의 인생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 있다.극단 장자번덕의〈운수대통〉(작 김광탁,연출 이훈호,제작·기획 김종필, 액팅코치 고재경)은 제목만으로는 일확천금의 행운을 이야기하는 작품처럼 보인다.그러나 공연은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의 기억 속에 묻혀 있는 잃어버린 금괴를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면서도,치매와 질병,쪽방 한편에서 가난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노년의 삶을 형상화한다.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의 기억을 따라 현실과 환영,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노년의 삶과 인생의 의미를 묻는'기억의 연극'으로 확장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그런 만큼〈운수대통〉의 희곡은 친절하지 않다.웹툰 적 상상력과 기억의 환영,현실이 파편처럼 흩어졌다가 이어지는 구조를 보인다.웃음의 요소로 과장과 비약이 뒤섞이고,현실의 전경이라기보다 웹툰의 한 컷처럼 생략되고 압축된다.이훈호 연출은 사실적으로 설명하기보다 극적인 언어를 이미지로 한 단계 형상화하는 미장센으로 전경화해 무대 언어로 재구성한다.연극은 웃다가 울게 되고,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짠해진다.치매에 걸린 노인이 되돌아가고 싶은 시간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환상처럼,노인들의 시간을 따라가는 무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허문다.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선형적 구조보다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거나 회상과 환상,기억이 뒤섞이는 구조로 관객들은 시간을 따라가게 된다.경남 사천 극단 장자번덕의〈운수대통〉이야기다.
◇웃다가 울게 되는 치매 노인들의
무대는 치매 노인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듯한 환영적인 무대 구조이면서도 현실의 전경이다.후면으로는 도심의 불빛이 노인들이 살아가는 달동네 어딘가로 짐작할 수 있고,무대 한 공간에는 전통가요로 노인들의 삶을 위로하는 아코디언 악사도 보인다.때로는 코러스(이수정 분)도 등장해 극 중 장면을 전환하거나 극중인물로 분하기도 한다.그 사이로 리어커를 힘겹게 끌고 달동네 언덕을 올라가는 귀먹은 할멈(정으뜸 분)의 전경 속에서 웃다가 울게 되는 치매 노인들의 생존법이 시작된다.등장인물들도 중풍 치료를 받는 노인1(이선무 분),온갖 병을 달고 사는 노인2(차영우 분),치매에 걸렸으면서도 멋쟁이로 살아가는 여사(손미나 분),기억을 잃어버린 치매 노인3(김동곤 분),쪽방 한켠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귀먹은 할멈,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복지사 새댁(고상희 분)정도다.노인3의 환영으로만 존재하는 분신인 젊은 남자(김용준 분)도 극중인물이다.
연극은 이렇다.치매 노인3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은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쑥 끼어들기도 하고,과거의 기억과 환상이 중첩되면서 다양한 이미지와 시간을 끊임없이 소환한다.극 중 장면들은 치매에 걸린 노부부가 마치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을 대하듯 같은 상황을 반복하며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는데,기억을 잃어가는 노년의 현실을 마주할 때면 먹먹해지기도 한다.기억을 잃어버린 노인3이 친구들과 함께 노인2가 사는 쪽방촌 한켠에 숨겨둔 금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기억과 현실이 뒤엉킨 치매 노인들의 생존법이 펼쳐지고,때로는 벽면에 산수화처럼 똥칠하는 장면도 이어진다.노인2와 멋쟁이 여사가 뒤엉켜지는 장면에서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과거인지,혹은 한 치매 노인의 의식 속에서 파편화된 기억인지 그 경계는 모호해 진다.관객들 역시 현실과 환영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 채 치매 노인3의 기억이 만들어 내는 시간과 이미지 속을 따라가게 된다.이어지는 극 중 장면들은 귀먹은 할멈이 억척스럽게 살아온 인생사를 들려주기도 하고,노인들이 단체로 콜라텍을 찾아 춤을 추고 흘러간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노년의 삶을 풀어낸다.콜라텍의 극 중 장면도 단순하지만은 않다.
◇노년의 콜라텍, 소멸되어가는 욕망의 생(生)과 사(死)
노년의 콜라텍은 치매와 질병,삶의 가난으로 지친 인생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춤추고 사랑하며 사람을 만나는 노년의 공동체이자,삶의 욕망을 다시 충전하는 생존의 공간으로 봐야한다.이훈호 연출은 이 공간을 통해 노년의 외로움과 삶의 활력을 블랙코미디의 정서로 풀어내면서도,생기를 잃고 죽음으로 향하는 노년들의 삶을 응시한다.평범한 콜라텍의 분위기와 아코디언 연주,알 수 없는 부조리한 대사들만 보면 치매 노인들의 인생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 것처럼 보이면서도,〈운수대통〉에서 핵심적인 장면은 콜라텍과 젊은 남자의 등장이다.우선 콜라텍은 삶의 희로애락이 응집된 공간이다.연출은 인간이 욕망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삶의 의지와 생기를 잃어가는 과정,곧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을 응시한다.인간이 욕망과 욕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생기다.즉 몸으로 흡수되는 에너지의 기운이다.욕망은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삶의 에너지이자 희로애락의 원천이다.욕망이 채워지고 순환될 때 사랑도 하고,성적 욕망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사그라지고 생기를 잃어버리면 삶은 죽음을 향해가게 된다.그래서 김광탁은 노년의 욕망을 희화화하면서도,사랑하고 춤추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노인들의 욕망을 끝까지 살아 있으려는 인간의 본능으로 바라본다.그러면서도 콜라텍 극 중 장면에서 노인3의 성적 욕망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노골적인 대사로 드러내며 노인의 죽음을 블랙 코미디적으로 암시하고 있다.〈운수대통〉의 여러 극 중 장면이 치매 노인들의 삶을 드러내는 작가적 설정과 재료였다면,콜라텍 장면은 이 작품의 의미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그래서〈운수대통〉은 웃음으로만 소비되는 작품이 아닌 것이다.아코디언 연주는 치매 노인들이 살아온 지난 인생이자 각자의 내면을 연주하는 인생사이고,흘러간 노래는 고단했던 삶의 시간을 위로하는 찬가가 된다.또한 노인3의 기억 속 환영으로 존재하는 젊은 남자는 어느 순간에는 노인3의 분신(分身)처럼 그의 곁에 서 있고,때로는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젊은 남자는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 치매 노인3이 끝내 잊지 못한 청년 시절의 자아이자 잊을 수 없는 각인된 기억의 형상이다.현재의 노인과 과거의 젊은 자아가 한 무대 위에서 공존하는 장면에서는 현실과 환영,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허물며 이 작품이'기억의 연극'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토끼,날다 이후,이훈호 연출의 생존법
이훈호 연출의〈운수대통〉은 메타 연극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무대 위에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가 등장해 흘러간 대중가요를 부르고,무대 진행자는 극 중 장면을 설명하거나 다음 장면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이훈호 연출은 아코디언 연주자와 무대 진행자를 등장시켜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연극의 일루전이라기보다 하나의 연극임을 환기하게 하는 메타 연극적 장치를 적극 활용하는데,이러한 장치들이 작품을 효과적으로 살려냈다.극의 환상을 깨뜨려 관객과 거리를 두는 브레히트식 소격효과라기보다 치매 노인3의 흩어진 기억을 이어 붙이는 또 하나의 기억 장치로 기능한다.현실과 환영,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비선형적 시간 구조를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도록 돕는 연출적 장치인 셈이다.그런 만큼 이훈호 연출의〈운수대통〉은 웃다가 울게 되는 치매 노인들의 서사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것도,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와 웃음의 리듬감으로 희곡의 서사를 무대 위에 생생하게 살려낸 것도 기막힌 연출의 반전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무대 곳곳에 선명하게 채워지는 이미지와 상징적 장치들이다.이훈호 연출은 극 중 장면마다 배치한 이미지와 미장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치매 노인의 기억 풍경을 형상화한다.각각의 장면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치매 노인3과 노인들의 기억 시간을 따라 서사가 쌓이고,그 이미지들은 결국 삶과 죽음,기억과 망각으로 소멸하면서도 인간의 삶은 금괴처럼 물질성으로만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금괴로 인생을 채워가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그런 만큼 금괴의 의미는 누구에게는 과거의 젊은 시간일 수도 있으며,다른 사람에게는 건강했던 시절의 기억일 수도 있고,때로는 변변한 집 한 채를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물질이기도 하다.그러나 금괴의 희망은 이미 다다른 것이다.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금괴가 등장하지 않는다.각자의 마음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극단 장자번덕 이훈호 연출의 전작〈토끼,날다〉에서 남해 용궁 장면은 그의 상상력과 미장센이 가장 선명하게 이미지화된 장면이었다.남해의 특산물인 가오리와 복어를 비롯한 다양한 산해진미가 동화적인 이미지로 펼쳐지면서 무대는 입체적이고 시각적인 공간으로 확장되었고,이미지와 상징,오브제,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무대 언어를 응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장면을 제외하면 당시 작품에서는 이훈호 연출만의 언어와 미장센이 작품 전반으로 충분히 확장되지 못한 채 다소 부분적으로 머문다는 아쉬움도 남았다.반면〈운수대통〉에서는 이러한 연출적 특징이 특정 장면에 머물지 않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무대 언어로 확장된 것이 이 작품이 블랙코미디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장점이다.
현실적인 노년의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과 환상,기억과 망상을 넘나드는 장면마다 상징적 이미지와 오브제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극 중 인물들의 삶의 정서를 쌓아 올린다.무엇보다 배우들의 동선과 신체 움직임,무대 전환의 앙상블이 좋으면서도 연출의 이미지가 서사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전작에서 취약했던 이훈호 연출의 시각적 상상력이〈운수대통〉에서는 작품 전체를 견인하는 연출적 이미지 언어로 성숙해졌다는 점이 인상적이다.부산에서 활동하는 배우 손미나는 저런 감각적인 배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극중인물의 캐릭터를 명확하게 살려냈고,좌충우돌 대사를 안정적으로 받아내면서도 노년의 인생을 표현한 김동곤의 연기도 치매의 기억과 환영으로 존재하는 노인3의 인물을 젊은 남자와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까지 절제하면서 극중인물의 의미를 부여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장면구도를 움직임으로 부각하는 고재경 액팅코치의 장점도 보이면서도이선무,차영우,고상희,정으뜸,이수정,김용준 배우의 연기와 악사들의 연주도 극으로 모이며 좋은 앙상블을 보여주니 연극〈운수대통〉은 경남 사천 극단 장자번덕의 대표 레퍼토리라 할 만하다. '운수대통'을 보면서 각자의 인생에 금괴는 무엇인지 한번 쯤 생각해 보는것도 어떨까.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