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만 빨라선 안 팔린다…달라진 슈퍼카의 조건

입력 2026-07-21 13: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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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확산에 고성능 희소성 약화
중국 판매 부진·전동화 비용 부담 겹쳐

페라리의 첫 순수 전기차
페라리의 첫 순수 전기차 '루체'. 전기모터 4개를 탑재한 사륜구동 모델로, 페라리 최초의 4도어·5인승 구조를 갖췄다. 페라리 홈페이지 캡처

배기음과 강력한 엔진, 압도적인 주행 성능을 앞세워 성장한 슈퍼카 시장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전기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 슈퍼카만 구현할 수 있었던 성능이 빠르게 보편화한 데다, 주요 소비 시장인 중국의 수요마저 위축되고 있어서다. 슈퍼카 업체들의 경쟁력도 차량의 속도와 출력에서 브랜드 가치와 희소성, 고객 경험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페라리의 순수 전기차 '루체'

변화를 상징하는 업체는 페라리다. 페라리는 지난 5월 첫 순수 전기차 '루체'를 공식 공개하며 전동화 시장에 뛰어들었다. 루체는 페라리 최초의 4도어·5인승 모델로, 전기모터 4개를 탑재해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2.5초 만에 도달한다. 가격은 55만유로(약 9억3천만원)로 책정됐다. 공개 이후에는 강력한 성능보다 엔진과 배기음 없이도 페라리 특유의 감성을 구현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렸다.

전기차 시대에는 성능만으로 슈퍼카와 일반 자동차를 구분하기도 어려워졌다. 과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3초대에 도달하는 성능은 수억원대 고성능 차량의 상징이었다. 최근에는 이보다 가격이 낮은 고성능 전기차도 비슷한 가속력을 구현하고 있다. 중국 자동차 업체 역시 2초대 가속 성능을 앞세운 전기 슈퍼카를 내놓으며 전통 업체를 추격하고 있다.

전기모터는 출발과 동시에 큰 힘을 낼 수 있어 내연기관보다 빠른 초기 가속을 구현하기 유리하다. 배터리와 모터 기술이 발전하고 출력 경쟁까지 치열해지면서 빠른 속도 자체는 더 이상 일부 슈퍼카 브랜드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이에 따라 슈퍼카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단순한 출력과 최고속도보다 디자인과 역사, 한정 생산, 주문 제작, 브랜드가 제공하는 문화와 소유 경험이 구매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 상황도 녹록지 않다. 유럽 고급·고성능차 업체들의 핵심 시장이던 중국에서 판매가 줄면서 실적도 흔들리고 있다. 포르쉐의 지난해 중국 판매량은 전년보다 26% 감소했다. 같은 기간 포르쉐의 영업이익은 56억3천700만유로(약 9조5천463억원)에서 4억1천300만유로(약 6천990억원)로 92.7% 급감했다. 판매 부진에 전동화 전략 조정 비용 등이 겹친 결과다.

벤틀리 역시 세계 고급차 시장 위축의 영향을 받았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2억1천600만유로(약 3천656억원)로 전년보다 42.1% 줄었다. 다만 고가 선택 사양과 맞춤 제작 차량의 비중을 늘리면서 7년 연속 흑자를 유지했다. 판매량 확대보다는 차량 한 대당 수익과 고객 맞춤형 경험을 강화하는 전략이 실적 감소를 일부 완충한 것이다.

페라리의 첫 순수 전기차
페라리의 첫 순수 전기차 '루체'가 주행하는 모습. 루체는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2.5초 만에 도달한다. 페라리 홈페이지 캡처

◆국내 수입차 시장에도 변화 조짐

전동화 전환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도 부담이다. 고급차 업체들은 전기차 전용 설비와 배터리,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했지만 고가 전기차 수요는 당초 예상만큼 빠르게 늘지 않았다. 이에 일부 업체는 순수 전기차 전환 일정을 늦추고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차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슈퍼카 업체들에 전동화는 선택하기도, 외면하기도 어려운 과제가 된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코오롱모빌리티그룹은 최근 페라리코리아의 새로운 공식 판매사로 선정돼 부산 해운대에 전시장과 서비스센터를 열었다. 판매와 정비, 부품 서비스를 한곳에 모은 통합 시설을 앞세워 부산·영남권의 초고가 자동차 수요를 공략한다는 구상이다.

새 판매사의 합류는 차량 판매처가 하나 늘어난 데 그치지 않는다. 전시장과 정비 시설, 맞춤형 상담과 고객 행사 등 구매 전후의 접점 전반에서 서비스 경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한정된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슈퍼카 시장에서는 판매량뿐 아니라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고 장기간 고객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동화는 슈퍼카에서 엔진의 절대적 지위를 흔들었고, 중국 시장의 침체는 기존 성장 방식에도 제동을 걸었다. 속도와 출력만으로 높은 가격을 설득하기 어려워진 슈퍼카 업체들이 이제는 자동차의 성능을 넘어 브랜드의 역사와 희소한 경험을 판매하는 경쟁에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