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규 칼럼] 영남, '행동하는 유림' 재건에 앞장서자

입력 2026-07-24 12: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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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규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

조한규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
조한규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

한국 유학의 본향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영남 유림(儒林)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행동으로 시대를 구해왔다. 그 역사적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대표적으로 '영남만인소'와 '파리장서운동'을 꼽을 수 있다.

'영남만인소'는 '만 사람의 뜻이 곧 천하의 뜻'이라는 취지로 1만명 안팎의 영남 유림이 연명해 올린 집단 상소다. 첫 만인소는 1792년 영남 유림 1만57명이 연명해 사도세자의 신원(伸冤)을 청한 상소였다. 2차는 1823년 서얼차별 철폐 만인소, 3차는 1855년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 4차는 1871년 서원철폐 반대 만인소, 5차는 1875년 흥선대원군 봉환 만인소, 6차는 1881년 이황의 후손 이만손(李晩孫)이 소수(疏首)를 맡아 올린, 가장 널리 알려진 위정척사(衛正斥邪) 만인소다.

7차는 1884년 갑신 의제개혁 반대 만인소로,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142년 만인 2026년 2월 11일, 영남 유림은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등 독립유공자 20인에 대한 서훈 재평가와 등급 상향을 촉구하는 상소문 형식의 청원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른바 8차 영남만인소인 셈이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1운동 직후 영남의 심산 김창숙, 면우 곽종석 등이 주도해 유림 대표 137명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며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보낸 항일 독립운동이다. 당시 파리장서엔 영남 유림 120명, 호서(충청) 유림 17명이 서명했다.

곽종석과 교류하던 간재 전우를 중심으로 한 호남 유림도 처음엔 참여를 결정하고 초안까지 준비했으나, '왕정복고냐 민주공화정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가 시기를 놓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파리장서운동은 사실상 영남 유림이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영남 유림은 퇴계학의 전통을 이어 서원과 문중을 중심으로 한 강한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의리와 절개를 중시하는 학풍이었기에 식민지 현실 앞에서 침묵보다 항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만회하려는 의지 또한 강했기에 파리장서운동을 적극 주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반 국민이 기억하는 영남 유림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고풍스러운 도포를 입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등 문화유산 전승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전통문화 교육 프로그램, 유교 학술 및 인문 프로그램, 한옥 체험 숙박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유림 문화를 보존·계승하고 있어 다행이다. 반면 다른 지역의 유림은 유명무실해 거론하기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영남 유림은 현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위기 극복과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실천 유학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학문은 박제에 불과하다. 원래 영남의 퇴계학은 순수한 도학(道學)과 심학(心學)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퇴계학을 계승한 영남 선비들은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인간의 도리와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강조했다. 학문을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백성과 사회를 이롭게 하려는 실천으로 이해한 것이다.

가령 갈암 이현일과 그 후예들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국가 재정과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200여년에 걸쳐 '홍범연의'를 편찬한 사실이 실천 유학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조선 후기 7차에 걸친 영남만인소는 영남 유림이 '박제된 유림'이 아닌 '행동하는 유림'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렇다면 '행동하는 유림'이 되기 위해 영남 유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퇴계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단순히 '도덕적 유산'을 계승하는 차원을 넘어, AI시대의 언어로 재구성해 '살아 있는 사상 체계'로 복원해야 한다.

둘째, 영남 유림은 8차 영남만인소의 차원을 뛰어넘어 현실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대구경북행정통합과 같은 현안에 대해 차원 높은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셋째, 이언적·이황·이현일 등 영남 도학자들이 지녔던 '영성(靈性)'을 바탕으로, AI시대를 주도할 '새로운 영성'을 계발해야 한다. 퇴계가 청량산으로 오르며 수행했던 심신수련법을 2030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체계로 재구성하는 현대화를 시도해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