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의 동아시아 신화에서 역사로] 중원에 우뚝 섰던 동이족 국가들(2) 거국(莒國 ?~ BCE 343)

입력 2026-07-13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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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에 살았던 동이족들 무리 지어 성읍 세워
성곽으로 둘러싼 도시 '성읍'...정치·행정 중심지

거주박물관
거주박물관

◆중원 지역 성읍의 건설과 동이족
중원에 살았던 동이족들은 무리를 지어 성읍을 세웠다. 성곽으로 둘러싼 도시인 성읍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가장 먼저 성곽을 쌓은 이는 우(禹)임금의 아버지 곤(鯀)이다. 『사기』·『제왕세기』·『세본』 등의 고대 사료에 따르면, 황제(黃帝)는 누조(嫘祖)와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소호(少昊) 김천씨이고 둘째가 창의(昌意)다. 소호 김천씨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여서 성(姓)을 김(金)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김유신 비문」도 "〈김유신은〉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한 것처럼 우리 역사와 직접 연결되는 동이족이다. 첫째 소호가 동이족이면 둘째 창의 역시 동이족이 분명한데 그는 전욱(顓頊)을 낳고, 전욱은 곤(鯀)을 낳았다. 곤의 증조부가 소호와 창의의 부친 황제이고, 조부는 창의이며 소호는 곤의 삼촌이다. 황제, 소호, 창의, 전욱, 곤은 모두 동이족이다. 중원지역 성읍을 건설하고 나아가 고대국가를 형성한 민족은 우리 동이족이라는 뜻이다.

◆곤과 우의 치수와 성읍의 기원
공자가 왕위를 선양했다고 크게 높였던 요(堯)임금도 역시 동이족이다. 요 임금 시대에 22년 동안이나 대홍수가 계속되자 요 임금은 곤에게 치수(治水)를 맡겼다. 곤은 둑을 쌓아 물길을 막으려 했으나 치수에 실패했다. 곤의 치수와 관련해서는 '식양(息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식양은 스스로 자라면서 부풀어 오르는 특징을 가진 신비한 토양이다. 고대 동이족의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에는 곤이 천궁(天宮)에 감춰져 있던 천제(天帝)의 식양(息壤)을 훔쳐 홍수를 막으려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이후 그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우(禹)인데 그는 부친의 실패를 거울삼아 물길을 터 주는 방식으로 치수에 성공하였다. 요 임금에게 자리를 선양 받았던 순(舜)임금은 중국 학자들도 모두 동이족으로 인정하는데, 우에게 천하를 넘겨주었고 우는 중원의 삼대(三代), 즉 하·은·주(夏殷周)의 첫머리 국가인 하(夏)를 세웠다. 곤과 우가 치수에서 사용했던 둑을 쌓는 토목기술 등이 나중 성곽과 성읍을 쌓는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곽과 성읍은 자기 씨족을 결집시키고, 다른 씨족을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성읍들이 연합하여 나라를 이루었는데 성읍의 씨족 가운데 가장 역량 있는 종족이 왕족으로 추대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고대 하·은·주 3대는 여러 성읍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나라였다. 곤과 우의 치수에서 비롯된 성곽과 성읍이 고대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기전 715년에 거국과 노나라 은공이 부래((浮來)에서 맹약하는 장면.
서기전 715년에 거국과 노나라 은공이 부래((浮來)에서 맹약하는 장면.

◆새로운 성읍의 개척
성읍은 변방을 지키거나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 새로 건설되기도 하였다. 왕족 중 누군가가 왕도(王都)를 떠나 새로운 성읍을 건설하는 분할제도도 있었다. 새로운 성읍의 개척자는 반드시 본래의 씨족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휘호(徽號)와 새로운 영토의 관할권, 본래의 씨족 왕족과의 연속성을 보증하는 의식부호나 도구 등을 가지고 출발했다. 본래 종족의 기억과 유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할제도를 통해 형성된 성읍국가는 하나라 때에 1만여 국이었다가 동맹이나 전쟁 등을 겪으면서 은나라 때에는 3천여 국, 주나라 무왕 때에는 1천 800여 국으로 줄어들었다.

하·은·주 3국은 성읍국가를 대표하는 힘 있는 국가였지 유일한 국가는 아니었다. 은나라의 갑골문에는 1천 개나 되는 성읍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 산동성 서부, 하북성 남부, 하남성 동부, 안휘성 부북와 강소성 일대에 있었다. 은나라 갑골문에는 은나라 탕임금이 하나라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했어도 그 주변의 성읍국가들은 여전히 존재했다고 말해준다.

◆소호의 후예, 거국의 기원
주 무왕은 은을 정벌한 후 자신의 친족들과 공신들뿐만 아니라 옛 하나라와 은나라 왕족의 후손들에게도 봉지를 하사하고 제후로 삼았다. 그 중 하나가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던 거국(莒國)이었다. 사마천은 『사기』 「진본기」에서 진나라 선조의 성은 영(嬴)인데, 그 후손으로 서씨(徐氏), 담씨(郯氏), 거씨(莒氏) 등이 있다고 했다. 이들의 성씨가 곧 나라 이름이었다. 중국 서진(西晉) 시대 두예(杜預, 222~285)는 『세족(世族)』에서 "거국은 영성이며 소호의 후예"라고 했으니 동이족 국가다. 서국과 담국 역시 동이족 국가이다. 산동성 동남부에 있던 거국은 북쪽으로 제나라와 접했고, 서쪽으로는 노나라와 이웃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같은 소호의 후손 국가인 담국과 닿아 있었다. 동쪽은 황해가 펼쳐져 있었다. 거국은 소호의 후예라는 점에서 신라왕실과 뿌리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거국은 어떠한 문화적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을까.

수륙전투도
수륙전투도

◆선사문화의 계승과 거국
거국이 위치한 산동성 동남부 지역은 구석기 시대 이래 거국의 성립까지 후리문화(后李文化 BCE6500~BCE5500), 북신문화(北辛文化BCE5300~BCE4100),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BCE4100~BCE2600), 용산문화(龍山文化BCE2600~BCE2000), 악석문화(岳石文化BCE2000~BCE1600)를 거쳤다. 후리문화에서 악석문화까지 각 문화층의 유물들이 연속적으로 출토되었는데 이는 모두 동이족 문화이다. 주 무왕(武王)은 서기전 1046년 경 은을 멸망시키고 소호의 후손인 자(兹)를 거국에 봉했는데 그가 시조인 자여기(茲輿期)다. 주 무왕이 동이족인 소호의 후손 자여기를 거국에 봉한 것은 그가 은나라의 왕성과 그 주변만 점령했을뿐 거국을 포함한 은나라의 제후국들을 모두 복속시키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거국은 주대(周代)에만 약 700년간 존속하였는데, 이는 주나라가 동이족의 세력권인 산동반도를 실제로 지배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춘추 강국 거국과 제환공
춘추시대 유명한 동이족 국가는 서국과 담국이지만 거국도 강국으로 손꼽혔다. 주나라 때 제후국은 7정(七鼎)까지 갖출 수 있었는데 거국은 7정을 갖춘 정식 제후국이었다. 또한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齊)·노(魯)·송(宋)·채(蔡)·정(鄭)·위(衛) 등 여러 나라와 회맹을 맺었는데,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만도 30여 차례에 이른다. 거국이 상당한 정치적 위상과 외교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춘추시대 거국은 인근 국가의 귀족은 물론 때로는 군주들도 망명하여 보호를 받았다. '거나라에 있을 때를 잊지 말라'는 뜻의 '물망재거(毋忘在莒)'라는 사자성어는 훗날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가 된 제환공(齊桓公)이 공자 시절 거나라로 망명했던 일화에서 유래한 고사다. 당시 제나라는 군주인 양공(襄公)의 폭정, 공손무지(公孫無知)의 양공 시해, 공손무지의 암살 등을 차례로 겪으면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양공의 동생 공자 규(糾)는 노나라로, 후에 제환공이 되는 공자 소백(小白)은 거나라로 망명했다. 소백은 거국의 보호를 받다가 제나라 왕위에 공백이 생기자 규를 속여 제나라에 먼저 도착해 왕위에 올랐다. 물망재거의 고사는 당시 거국이 노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국력을 가진 국가였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거국은 화폐를 자체적으로 발행할 정도로 부강한 나라였다.

춘추전국시기 노예와 평민 봉기 지도
춘추전국시기 노예와 평민 봉기 지도

◆거국의 교육 전통
거국은 교육열이 매우 높고, 교육 수준 역시 뛰어났다. 이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숙문(叔文)의 일화이다. 숙문은 거국의 재상으로 3년간 재직하고 낙향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3년을 재상으로 있으면서 말과 수레는 많아졌지만, 네가 한 일은 장차 이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내가 듣건대 군자가 시(詩)·서(書)·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반드시 사치와 방탕한 마음이 생기고, 소인이 농사를 좋아하지 않으면 반드시 도둑질하는 마음이 생기며, 부인이 길쌈을 좋아하지 않으면 반드시 음란한 행실이 생긴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은 곡식을 기르는 것과 같고, 새가 날개를 가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거국이 교육을 무엇보다 중시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거국에서 유래된 맹강녀 설화
거국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워 대국들과 경쟁하였다. 거국은 향(向)나라를 공격하고, 기(纪)나라를 점령했으며, 운(郓)나라를 정벌하고, 담(郯)나라와 싸우는 등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잦은 전쟁은 후대에 다양한 설화를 낳았다. '맹강녀가 장성에서 곡했다'는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长城)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서기전 550년에 거국과 제나라가 전쟁 중 제나라 장수 기량 (杞梁)이 전사했다. 그의 부인 맹강녀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자 성벽이 무너졌고, 맹강녀는 마침내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 이야기를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생겨난 이야기로 알려졌지만 거국 시기의 이야기가 후대에 잘못 전해진 것이다.

◆거국의 몰락 원인
거국은 춘추시대 유력한 강국 중 하나로서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사회적 모순이 존재했다. '맹강녀곡장성' 이야기는 잦은 전쟁이 거국을 멸망으로 이끈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잔혹한 노예제도가 있었다. 거국은 노예를 귀족과 함께 순장했으며, 칼을 제작하면 노예의 목을 베어 그 성능을 시험했다. 거국의 가혹한 노예제도는 노예들의 봉기를 불러왔고, 평민들까지 가세하였다. 본래 동이족은 생명을 중시하는 문화를 지녔으나 같은 동이족 국가인 거국은 생명을 경시하는 잔혹한 노예제도 등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과 저항을 불러왔고, 결국 멸망의 불씨가 되었다. 거국은 주변 제후국들과의 잦은 전쟁까지 겹치면서 국력이 쇠퇴해 갔다. 『사기』는 기원전 431년 거국의 도읍이 초나라에 함락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거국은 곧바로 멸망하지 않았다. 거주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잔존한 영토는 기원전 343년 제나라에 병합되면서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300년 전 제환공을 보호해 준 거국이 도리어 제나라에게 멸망당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