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 격동 80년] 말 한마디가 죄, 긴급조치의 시대

입력 2026-07-24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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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14일 매일신문 1면 기사.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고, 이에 따라 헌법의 부정과 반대 운동이 금지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매일신문 DB.
1975년 5월 14일 매일신문 1면 기사.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고, 이에 따라 헌법의 부정과 반대 운동이 금지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매일신문 DB.

1975년 대한민국은 '긴급'이라는 이름 아래 숨을 죽여야 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잇따라 발동되면서 국민의 기본권은 뒤로 밀려났다. 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지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 유신이 낳은 권한

긴급조치의 출발점은 유신헌법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한 발판으로 유신헌법을 만든다. 정부는 안보 위협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 개편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당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지지 세력이 뭉치면서, 연임을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방법은 단 하나였다. 편법을 벌여야 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기로 했다. 대통령의 연임 제한도 없앴다. 반면 국회의 국정감사권은 폐지됐고, 연간 회기 역시 150일 이내로 제한됐다.

거꾸로 대통령의 권한은 대폭 확대됐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긴급권'인 긴급조치였다. 대통령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 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국민의 기본권과 사법 절차까지 제한할 수 있었다. 대통령을 견제하던 장치들도 긴급조치 앞에서는 속수무책 힘을 잃었다.

1972년 유신헌법 표어 붙이는 어린이들. 매일신문 DB.
1972년 유신헌법 표어 붙이는 어린이들. 매일신문 DB.

◆ 긴급조치의 칼날

첫 번째 긴급조치는 1974년 내려졌다.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이 확산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강하게 억제하기 시작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개정·폐지를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이어 발표된 2호는 위반자를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정부는 북한의 위협과 불안한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조치는 실제 처벌로 이어졌다.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장준하와 백기완 등이 구속됐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각계 인사와 대학생들이 잇따라 체포돼 법정에 섰다. 같은 해 발표된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관련 단체 가입, 집회 참여 등을 금지하고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야당은 곧바로 맞섰다. 긴급조치 1호와 4호의 해제를 요구하는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같은 해 8월과 12월에는 긴급조치 5호와 6호가 발표되면서, 기존 긴급조치가 해제됐다.

◆ 이어지는 일상 통제

사태는 종식되지 않고 1975년까지 이어졌다. 대통령이 긴급조치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한,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4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7호는 고려대학교를 겨냥했다.

당시 고려대 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전방위적으로 정권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꺼내 들며 그들에게 철퇴를 내린다.

7호는 고려대학교를 정조준했다. 휴교를 명하고, 학교 내 집회와 시위를 전부 금지했다. 조치를 위반할 때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영장 없이 체포와 구금이 가능했다. 조치가 시작되자 고려대학교 앞은 을씨년스러워졌다. 철모와 총을 든 군인들이 교문을 에워싸고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 달여 뒤인 5월 13일 긴급조치 8호로 7호는 해제됐지만, 곧바로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9호는 가장 광범위한 긴급조치였다. 정부는 국가 안전과 공공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헌법을 부정하거나 개정을 주장하는 행위,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 등을 모두 금지했다.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 압수수색도 허용됐다.

술에 취해 "유신헌법은 독재를 위한 헌법"이라고 말하거나, 가족의 죽음에 격분해 대통령을 욕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막걸리만 마시고 말실수를 해도 잡혀간다"며 긴급조치 9호를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9호 조치는 4년 7개월간 이어진다. 긴급조치의 피해자만 1천140명이고, 이 중 970여 명은 9호 조치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1975년 긴급조치 7호 고려대 봉쇄. 긴급조치 7호가 선포돼 휴교명령이 내려진 고려대학교에 병력이 진입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1975년 긴급조치 7호 고려대 봉쇄. 긴급조치 7호가 선포돼 휴교명령이 내려진 고려대학교에 병력이 진입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 뒤늦은 위헌 결정

긴급조치에 대한 법적 평가는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뒤집혔다. 2013년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1호와 2호, 9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긴급조치는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긴급조치는 국민의 신체와 인신의 자유, 행복 추구권과 적법 절차에 따른 형사처벌 원칙 등을 위배하거나 과도하게 제한한 불법행위라고 해석했다. 이로써 긴급조치로 인해 전과자가 됐던 이들은 기록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

2022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후 유신 철폐를 요구하다 불법 체포·구금된 이철우 목사 역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긴급조치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수많은 시민을 범죄자로 만들었고, 일상의 말과 행동까지 통제했다. 국가의 잘못은 뒤늦게 인정됐지만, 그 상처와 흔적은 오랫동안 남았다.

1975년 긴급조치 위반자가 석방되는 모습. 전국 각 교도소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인사들이 풀려난 가운데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되는 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가족들이 부둥켜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1975년 긴급조치 위반자가 석방되는 모습. 전국 각 교도소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인사들이 풀려난 가운데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되는 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가족들이 부둥켜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매일신문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