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전투는 오래전에 막을 내렸지만, 그 흔적은 아직 대구 곳곳에 남아 있다. 왕건의 패주와 견훤의 추격,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스며든 지명들은 천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도 당시의 치열했던 전장을 증언하고 있다.
살내천 일대에서는 견훤과 왕건의 군사들이 사활을 걸고 칼을 맞댔다. 둘 중 하나가 무너져야 끝나는 전쟁이었다. 팔공산 자락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전선은 이리저리 출렁이며 엎치락뒤치락했다.
◆ 패배는 고개 이름을 남기고
이 과정에서 '나팔고개'가 이름을 얻었다. 고려군이 고개 너머에 진을 친 후백제군을 향해 나팔을 불었다는 설, 반대로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포위하며 진격의 나팔을 울렸다는 설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쪽이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수많은 병사가 갑옷을 부딪치며 고개를 내달렸을 것이다.
전선은 이제 동화사와 파계사로 올라가는 갈림길로 옮겨졌다. 고려군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 후백제군에게 맞섰으나 참담히 패배한다. 장수들은 후백제 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며 도망쳤다. 이들 고려군이 파했다고 해 고갯길은 '파군재'라고 불리게 됐다.
그때 고려군의 잔당을 해치우던 후백제군의 눈이 번뜩였다. 고려군의 수장인 왕건이 보이지 않아서다. 그를 비롯해 충직한 신하 신숭겸과 김락도 자취를 감췄다. 그들의 목을 베어내지 않으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터였다. 후백제군들은 이미 피로 얼룩진 칼을 쥐고 수장들을 찾아 나섰다.
◆ 대신 죽는 충신들
도망치던 왕건을 충직한 신하들이 붙들어 세웠다. 자신들이 짜낸 마지막 묘책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군사를 통솔하는 왕의 상징인 겉옷을 벗긴 뒤, 신숭겸 장군이 자신의 옷과 바꿔 입혔다. 자신이 왕건의 행색을 하고 적을 유인할 테니 그사이 몸을 피하라는 뜻이었다. 김락 등 충직한 장수 몇 명도 뜻을 함께했다. 몇 번의 손짓 끝에 영락없는 왕의 무리가 완성됐다.
신숭겸 일행은 달음박질치며 후백제군을 유인했다. 눈이 벌게진 후백제군은 계책에 속아 넘어갔고, 왕건과는 점점 멀어졌다. 결국 신숭겸과 김락 등은 추격해 온 적들에게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왕은 살아남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지혜로운 계책이 나온 곳이라 해 지금의 '지묘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왕을 살리고 대신 죽음을 택한 이는 모두 여덟 명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충절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그래서 공산은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여덟 공신의 넋을 기린다는 뜻에서, 대구와 경북 지역을 두루 껴안은 산이 오늘날 '팔공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 산책길 된 도주로
팔공산 자락에는 왕건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왕건길'이 있다. 왕건의 행적을 담아 조성한 길로, 총 8개 테마 코스로 구성돼 있다. 이 기나긴 숲길의 시작점은 '신숭겸장군 유적지'다.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신숭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으로, 장군의 영정과 순절비가 자리하고 있다.
유적지에서 산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대곡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길목에서는 등산을 즐기는 주민들뿐 아니라 완만한 오솔길을 가볍게 달리는 자전거 이용객들도 마주칠 수 있다. 길이 어렵지 않다보니, 사람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부채질을 하며 산을 오른다. 오랜 세월 동네 사람들의 산책로이자 쉼터 역할을 해온 친숙한 길이다.
숲길을 지나 마침내 전망대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인다. 눈앞에는 팔공산 능선과 함께 왕건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자락이 한눈에 펼쳐진다. 지금은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이지만, 천여 년 전 이곳에서는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험준한 산세를 타고 넘으며 목숨을 건 격전을 벌였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