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늘 바쁘다. 사람들은 출근하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고, 소비하고, 다시 떠나기를 반복한다. 도심은 그렇게 사람을 빠르게 흘려보내는 장치처럼 작동한다. 거리의 속도는 빨라지고, 상점의 간판은 더 밝아지지만, 정작 잠시 앉아 숨을 고를 틈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좋은 도심은 사람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잠시 붙잡고, 앉히고, 쉬게 한다. 마치 침실처럼 편히 눕히기도 한다. 빌딩숲 사이 작은 잔디밭 하나가 도시의 표정을 바꿀 수 있다.
이제 공원의 가치는 초록의 면적만으로 따지기 어렵다. 얼마나 많은 나무가 심겼느냐보다, 그곳에서 시민이 얼마나 오래 또 편안히 숨을 고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도심의 잔디는 풍경이기 전에, 바쁜 하루 중 굳어진 몸과 마음을 잠시 풀어주는 공간이다.
이 질문은 대구 도심 공원을 향해서도 던져볼 수 있다. 도쿄와 교토, 뉴욕의 작은 잔디공원들이 보여준 장면은 대구에도 유효한 질문을 남긴다. 도심 공원은 이제 보는 녹지를 넘어, 머무는 장소가 될 수 있을까.
◆도심 속 무장해제
평일 낮이었던 지난 4월 21일 오후 방문한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역 인근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학교 운동장 만한 크기 공원에서 점심시간 또는 업무 중 휴식을 즐기는 학생과 직장인들, 하원·하교한 자녀를 데리고 여가를 즐기는 부모들, 그리고 겉모습만 봐서는 어떤 목적으로 공원을 찾았는지 알 수 없지만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분명한 시민들까지.
더욱 놀라운 건 돗자리를 깔거나 아예 몸 그대로 잔디밭에 앉고 누운 사람들이 상당수였다는 점이다. 한국이라면 평일 일과 후 또는 주말에나 인기 공원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 공원 주변은 같은 도쿄의 신주쿠역·시부야역과 함께 일본 최상위권 혼잡도를 보이는 이케부쿠로역을 비롯한 대형 건물로 가득한 빌딩숲이다. 그 속의 라운지 같은 공원이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이다. 낮이면 도심을 채우는 수많은 인구가 일과 중 틈을 내 이 공원을 찾아 잔디밭 위에서 무장해제를 하는 셈이다.
한달 뒤였던 5월 31일 오후 찾은 일본 교토 릿세이광장에서도 똑닮은 풍경을 확인했다. 역시 학교 운동장 규모의 공원 인조잔디 위에 남녀노소 교토 주민들이 앉거나 누워 있었고, 관광지 교토 도심 한복판에 있는 만큼 여행 중 들러 아무렇게나 몸을 뉘이고 인증샷을 촬영하는 관광객들도 볼 수 있었다. 불과 몇 걸음 밖은 주민과 관광객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뒤섞이지만, 이곳은 비록 인조잔디이기는 하나 땅도 푸르고, 뻥 뚫린 하늘도 푸르며, 광장 바로 옆에 흐르는 하천인 다카세가와의 푸르름까지 더한, 도심 속 오아시스였다.
이들 장면을 이름 붙이면 '도심형 짧은 피크닉'이다.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내는 주말 나들이가 아니다. 점심시간 30분, 업무 중 빈틈, 여행 동선 사이 잠깐의 휴식이다. 잔디 위에 앉거나 눕는 행위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도심 생활의 일부가 된 풍경이다.
◆보는 녹지→쓰는 녹지로
두 공원은 도쿄와 교토 도심 한복판 '작지만 똘똘한 도심 공원'의 대표 사례다.
공통점은 단순히 잔디의 존재에 있지 않다. 공원이 도심 생활권 한복판에 있다. 공원 중앙에 사람들이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잔디광장이 있고 공원 가장자리에는 카페·벤치·보행로·그늘·상업시설이 붙어 있다. 즉 '보는 녹지'가 아니라 '사용하는 녹지'다. 학계 표현을 빌리면 빽빽한 나무가 그늘과 산책로를 만드는 수림형 공간이라기보다는, 중앙부가 열린 잔디 공간이 휴식과 모임을 받아내는 오픈론(open lawn) 또는 퍼블릭 그린(public green)에 가깝다.
같은 도시 내 대형 수림형 공원과 구분된다. 도쿄의 경우 신주쿠교엔·요요기공원은 넓은 숲을 산책이나 정적 휴식의 용도로 쓰는 성격이 강하다. 반면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역세권 도심의 일상 속에서 잠깐 들어가 쉬기 좋은 공간이다. 교토 릿세이광장 역시 관광도시 교토의 번잡한 상가와 골목 사이에 있는 작은 마당이다.
1951년 문을 연 도쿄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부지 면적 7천818.5㎡의 작은 도심 공원이다. 2016년 4월 리뉴얼 오픈 후 '도심의 거실' 같은 장소로 자리 잡았다. 처음부터 이런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노숙인들이 머물고 치안 이미지도 좋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자 도쿄 도시마구는 공원다운 공원을 다시 만드는 것은 물론, 공원 관리비 증가와 이케부쿠로역 동쪽 노상 자전거 문제까지 함께 풀고자 대규모 리뉴얼에 나섰다.
지상에는 잔디광장과 카페를 배치했다. 카페 수익 일부는 공원 유지 관리에 쓰고, 구청·주민·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을 좋게 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공원 지하에는 변전소를 유치하고 대형 자전거 주차장을 마련해 수익성과 지역 문제 해결을 결합했다. 그러면서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은 치안, 상권, 유지 재원 등의 문제를 함께 풀어낸 도심 공원 경영 모델이 됐다.
교토 릿세이광장은 폐교 운동장 도시재생 사례이기도 하다. 1869년 개교한 옛 릿세이초등학교는 1993년 문을 닫았다. 이후 지역 행사 거점으로 쓰이다 2020년 '릿세이 가든 휴릭 교토'라는 복합시설로 재탄생했다. 전체 부지 약 4천900㎡에서 옛 학교 건물은 호텔과 도서관, 상업·문화시설로 재생됐고, 운동장은 인조잔디가 깔린 열린 광장이 됐다. 주민들은 폐교 부지를 큰 마당으로 선물 받은 셈이고, 관광객에게는 교토 도심의 숨은 쉼터다.
◆원형은 브라이언트 파크
두 시설의 더 유명한 원형을 탐색하면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 약 3만9천㎡ 규모의 공원, 브라이언트 파크가 나온다. 뉴욕공립도서관과 고층 업무지구 사이 녹색 가득 잔디광장이 상징인 이 공원은 1970년대만 해도 범죄와 방치의 이미지가 강했다. 반전은 1980년대에 추진된 공원 재생에서 나왔다. 재정비 후 1992년 다시 문을 연 브라이언트 파크는 높은 울타리와 시야를 가리던 요소들을 걷어내고 음식점을 배치했다. 이제는 공원의 상징이 된 2천개 이동식 의자도 들였다.
브라이언트 파크 역시 같은 뉴욕 도심의 센트럴 파크와 구분된다. 센트럴 파크가 맨해튼 북쪽의 거대한 수림형 도시공원이라면, 브라이언트 파크는 미드타운 업무지구의 짧은 쉼을 제공하는 오픈론형 공원이다.
미나미이케부쿠로공원, 릿세이광장, 브라이언트 파크 셋 다 일상 동선 안에서 잠깐 들어가 앉고 눕기 편리한 공원이다. 잔디는 조경 장식이 아니라 몸을 놓는 바닥이고, 가장자리는 벤치와 그늘과 카페가 있는 생활의 테두리다.
◆녹지율→체류율 필요한 대구
이어 살펴본 대구 도심의 공원들은 아쉬움을 남긴다. 대구 도심에도 나무와 녹음은 있다. 문제는 시민들이 잠시 앉고 눕고 먹고 쉬는 도심의 거실은 좀 부족하다는 점이다. 도심 공원이 과거 나무 심기에 치중하며 '녹지율'의 시대를 상징했다면, 지금 요구받는 건 '체류율'의 시대다.
물론 대구에도 두류공원 코오롱야외음악당, 수성못, 신천 둔치처럼 돗자리를 펴고 쉴 수 있는 야외 휴식 공간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목적지형 공간에 가깝다.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 시간을 내 이동해야 한다. 해외 사례들이 보여준 건 다르다. 앞서 말한 도심형 짧은 피크닉, 즉 점심시간 30분, 약속 전 20분, 장을 보거나 출근하는 길의 빈틈에도 가능한 잔디 위 휴식이다.
문제는 잔디밭을 좋아하느냐, 숲길을 좋아하느냐에 그치지 않는다. 대구 도심, 특히 동성로 일대가 요즘 직면한 난제가 공동화와 상가 공실, 유동인구 감소다. 상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건 더 많은 간판과 이벤트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도심에 와서 곧장 소비만 하고 떠나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물고 쉬고 기다리고 만나는 시간을 뒷받침하는 기반시설, 바로 공원이다.
잘 설계된 도심 공원은 상권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각종 상점들 사이에 작은 잔디와 그늘, 의자와 물길이 놓이면 도심 방문의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다. 체류가 늘어야 산책이 생기고, 산책이 생겨야 우연한 소비와 만남도 생긴다.
◆대구도 '오픈론' 활성화?
사실 대구 안에서도 바뀐 도심 공원 트렌드를 반영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 남구 옛 캠프워커 헬기장 반환부지에 조성 중인 '대구평화공원'이 최신 사례가 될 전망이다
오는 8월 준공이 목표인 이 공원은 조감도에서도 드러나듯이 2만8천374㎡ 면적의 핵심인 4천600㎡ 규모의 잔디광장이 공원과 도서관 이용객, 주변 유동 인구를 모아 머물게 하며 오픈론형 공원의 면모를 강조할 전망이다.
최근 젊은층의 이용 문화와 도심 체류 수요를 보면, 그리고 해외 성공 사례도 참고하면, 오픈론형 공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대구평화공원은 역시 과거에 비해 확장된 잔디광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구 서구 이현공원 등과 함께 그러한 변화를 대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행형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은 2.28기념중앙공원도 지난해 재단장을 통해 공간 일부를 나무를 줄여 탁 트인 잔디광장으로 조성, 오픈론형 공간에 대한 요구를 소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만 공원 내 잔디광장은 컬러풀대구페스티벌 등 행사 땐 인파가 몰리지만 평소엔 여전히 관상용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