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 전문성·대통령 리더십…대한민국 반도체 신화 출발점
오늘날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기둥이자,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한국의 주력 제품이 반도체다. 손톱 크기만 한 실리콘 조각 위에 세워진 전자산업의 기적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동이 걸린 것일까?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구미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 및 시험 공장(Fab)을 건설함으로써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도약의 기회는 정치학자들이 "발가벗은 권력에 의존하는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권력에 굶주린 군벌들의 집단적 독재 체제, 즉 전근대적인 신군벌주의 독재"(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로 저주하는 전두환 시대에 만들어졌다.
제5공화국 출범 직후,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은 반도체산업의 잠재력과 중요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전자산업 진흥 방안'을 통해 전자교환기(TDX), 컴퓨터와 함께 반도체를 국산화 개발의 3대 과제로 선정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이들은 1981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두 차례에 걸쳐 '반도체산업 육성 방안'을 보고했다.
당시 한국에선 '반도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국정 최고 책임자에게 반도체의 핵심 본질을 이해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과학기술비서관실 멤버들은 반도체란 무엇이며, 왜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지, 이것을 왜 지금 이 시기에 국가 핵심 산업으로 키워야 하는지를 만화로 그려 보고했다. 또 일본에서 직접 반도체를 공수해 실물을 보여주며 작동 원리와 메커니즘을 상세히 설명했다. 첨단 기술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한 청와대 참모들의 뜨거운 집념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1981년 '반도체공업 육성계획' 수립
대통령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쉽게 이해하고 적극 관심을 보였다. 이에 힘입어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은 1981년 5월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는 반도체공업 육성의 필요성, 제조 과정, 반도체공업의 현황과 문제점, 반도체공업 육성 대책 등을 담고 있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성 대책 : 웨이퍼 가공 분야를 국가 차원에서 국제 비교 우위 품목으로 육성, 기초 소재를 단계적으로 국산화. 생산구조를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고도화하고 논리소자·기억소자 등은 국책과제로 개발.
▷생산설비 현대화 : 1980년 현재 25%인 시설 자동화, 1986년까지 90%로 확대, 주요 기초 소재 단계적 국산화.
▷기술개발 자금 지원 : 1982~1986년까지 기초 기술개발 등에 200억 원 지원, 민간 기업에도 자금 지원.(이현덕, '과학기술이 미래다(94)-반도체 강국 담대한 도전', 전자신문, 2023년 7월 5일)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에 근무했던 정홍식(경제수석실 행정관, 정통부 차관)은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작업반을 구성하여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물이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을 반도체로 먹고사는 나라로 만드는 출발점이 전두환 대통령이었다는 뜻이다.
과학기술비서관실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7월 15일,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을 재가했다. 이어 1981년 11월,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반도체 기술도입 실태 및 대책'에 관한 특별 보고를 했다.
◆"모든 국무위원, 반도체산업 적극 협력하라"
특별 보고를 받은 전 대통령은 이후 반도체산업 관련 국무회의를 두 차례 열어 "우리의 선진국 진입 여부는 반도체 기술을 얼마나 빨리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국무위원은 반도체산업 육성에 적극 협력하라"라고 발언했다. 반도체산업에 대한 대통령의 독려가 우리나라 반도체산업 본격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와대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토대로 1982년부터 청와대에 한시적인 비상설 기구로 '반도체공업육성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청와대가 반도체 육성의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한 것이다. 위원장은 대통령 비서실장, 위원은 상공부·체신부·총무처·과기처 차관, 경제수석비서관, 관계 전문가 10인으로 구성했다. 위원회의 설치 목적은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한 총체적 방법론의 수립'이었다.
이 위원회의 주요 임무는 반도체산업 관련 기업에 금융 및 세제 지원, 원자재 수출입 지원, 반도체 공장 건설을 위한 용지 확보, 진입도로 개설 및 확충, 전력의 안전 공급 등 반도체산업 육성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을 총체적으로 다루었다. 이 위원회는 1983년 '정보산업 및 반도체공업 육성위원회'로 발전했고, 1984년에는 기술진흥심의회로 확대 변신하게 된다.
파괴는 쉽지만, 건설은 어려운 것이 인간사다. 패러다임 전환기에는 늘 극심한 산고(産苦)가 따르기 마련이다. 당시 한국의 산업구조는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격렬하게 추진되어 온 중후장대 형 중화학공업에 모든 힘이 실려 있었다. 국내에서 반도체산업의 본질과 업(業)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5공 정부가 경박단소형 반도체산업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자, 관료 사회를 비롯하여 학계에선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산업은 출발부터 숱한 반대에 직면하여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당시 우리 전자산업은 일본에서 반도체 칩을 공급받아야만 컬러 TV를 비롯한 전자제품의 제조가 가능했다. 반도체 칩 제조를 위한 원천 기술이 없으면 기술 종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전자산업의 질적 도약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반도체산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찬성론자들 입장이었다. 상공부와 과기처, 국책연구소들이 이쪽 진영의 대표선수였다.
반면에 국내 전문가를 비롯하여 외국 연구기관 등이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들은 한국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관련 기술과 인재의 부족, 좁은 내수시장이라는 한계, 미국·일본 등의 기술이 워낙 앞서 있어 수출 경쟁력 확보가 어렵고, 투자 자본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반대론의 선봉은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었다.
사업이 본격 시작되기도 전에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정부 내에서도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소모적이고도 치열한 논쟁을 극복하고 설득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만약 이때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 의견대로 반도체 개발에 일찍 착수했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대통령의 결단
찬반 논란이 뜨겁게 진행되던 1981년 9월 5일 전두환 대통령은 구미 수출산업공단에서 무역 진흥 월례회의를 주재했다. 이날 전 대통령은 "정부는 반도체산업 육성에 역점을 두겠다"고 명쾌하게 선언했다. 서석준 상공부 장관도 "전자산업을 1980년대 고도산업 국가 발전의 핵심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특히 반도체를 산업의 꽃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보고했다.
무역 진흥 월례회의가 끝난 후 전두환 대통령은 반도체 연구를 전담하는 정부 연구기관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를 방문했다. 최순달 KIET 소장은 대통령에게 반도체 개발 현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해 12월 전두환은 최순달 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전 대통령은 자신의 대구공고 3년 선배인 최순달 소장에게 "최 소장, 반도체는 선진국 도약에 꼭 필요한 기술이오. 최 소장이 책임지고 반도체를 성공시키시오"라고 두 손을 잡았다.
이 한마디가 황무지에서 기적을 일구어내는 출발점이었다. 모두가 천문학적인 적자와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주저할 때, 국가 최고 지도자가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선봉에 섰다.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의 전문성과 통치권자의 결단이 부정적 여론을 뒤엎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만약 그때 전두환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려 현실론과 타협했다면, 오늘날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반도체 신화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