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와 함께해온 삼성 라이온즈] ①한국프로야구에 퍼진 사자후

입력 2026-07-06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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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창단해
스타 군단,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

1989년 대구시민야구장 전경.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창단한 삼성 라이온즈의 홈 구장이었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개장한 2016년 이전까지 프로야구가 열렸다. 삼성 제공
1989년 대구시민야구장 전경.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창단한 삼성 라이온즈의 홈 구장이었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개장한 2016년 이전까지 프로야구가 열렸다. 삼성 제공

#들어가는 말

KBO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 닻을 올렸습니다. 올해로 44년째입니다. 리그 출범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도 출항했습니다. 매일신문이 이번에 창간 80주년을 맞으니 약 절반의 세월을 라이온즈와 함께한 셈이지요. 지역을 대표하는 신문사와 프로야구단, 대구시민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긴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매일신문은 이번에 80주년 창간 특집을 냅니다. 이번 기회에 지면을 빌려 삼성 라이온즈의 지난 역사를 한 번 들여다볼까요? 그냥 지나온 세월만 쭉 나열하면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겁니다. 1970년대생과 2000년생 가상의 꼬마 둘을 상정,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라이온즈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의 훈련 모습. 삼성 제공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의 훈련 모습. 삼성 제공

◆딱 한 발걸음 모자랐던 명문

아직 코흘리개 꼬마.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1학년인 소년은 잔뜩 들떴다. 생애 가장 큰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토요일 AFKN(주한미군방송)에서나 가끔 보던 야구,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려야 보던 야구를 TV에서 마음껏, 자주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커졌다.

1982년 3월 26일 금요일 오후. 집에서 숙제를 하던 소년에게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들었다. 평소 손찌검을 하지 않는 분이라 당황했다. 우리집 담벼락에 누군가가 분필로 낙서를 했고, 소년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한데 더 이상한 건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는 점.

1983년 삼성 라이온즈 덕아웃 풍경. 삼성 제공
1983년 삼성 라이온즈 덕아웃 풍경. 삼성 제공

일단 발뺌했다. '야구광' 아버지 차례. 삼성 선수 한 명 이름을 공책에 써보라 했다. 그걸 보곤 두 사람은 '역시'라며 웃었다. 소년은 '하막수'라 썼다. 담벼락에 쓰인 글귀는 '하막수 만세'. 범죄(?)가 간단히 탄로났다. 그제서야 소년은 삼성의 그 선수 이름이 '하막수'가 아니라 '함학수'인 걸 알았다.

이튿날인 3월 27일 토요일. 서울 동대문 구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다. KBO 한국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리는 역사적 시합. 소년은 TV 앞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소년의 영웅들이 모인 삼성 라이온즈가 서울을 연고로 한 MBC 청룡(현 LG 트윈스)과 맞붙었다.

삼성 라이온즈 내야수들이 1985년 2월 미국프로야구 LA 다저스 소속인 미국인 코치로부터 플레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3번은 배대웅, 7번은 김용국. 삼성 제공
삼성 라이온즈 내야수들이 1985년 2월 미국프로야구 LA 다저스 소속인 미국인 코치로부터 플레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3번은 배대웅, 7번은 김용국. 삼성 제공

삼성은 '스타 군단'이었다. 소년의 자부심도 컸다. 삼성이 5대2로 앞선 5회초 이만수가 프로야구 사상 첫 홈런을 날렸다. 7대7로 맞선 연장 10회말 국가대표와 삼성의 '왼손 에이스' 이선희가 청룡의 이종도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고개를 떨궜다. 소년도 울었다.

우승후보 0순위. 그 정도로 전력이 막강했다. 1970년대 고교야구 무대를 주름잡았던 경북고와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출신이 주축. 국가대표 출신이 즐비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박철순의 OB 베어스(현 두산)에 밀려 '원년 우승'이란 꿈을 접어야 했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 선수로 뛰던 시절의 이만수. 삼성 제공
'타격 달인' 장효조의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1983년) 모습. 삼성 제공

'타격 천재' 장효조가 가세했다. '헐크'란 별명이 붙은 이만수와 함께 강타선을 구축했다. 국가대표 에이스 김시진과 재일교포 출신 '황금 박쥐' 김일융이 최강 '원투 펀치'를 이뤘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또 고배를 마셨다. 1984년 최동원의 롯데 자이언츠에 밀렸다.

1985년 마침내 왕좌에 올랐다. 전기에 이어 후기도 우승, 전·후기 우승팀이 겨루는 한국시리즈도 생략됐다. 일부에선 그게 '진짜' 우승은 아니라고 했다. 한국시리즈를 거치지 않았다는 얘기. OB 팬이었던 친구도 그랬다. 소년은 항변했다. 삼성이 워낙 잘해 전·후기를 다 휩쓴 것뿐이라고.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을 달성한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이 대구시내 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삼성 제공
1983년 삼성 라이온즈 선수로 뛰던 시절의 이만수. 삼성 제공

해태 타이거즈(현 KIA)와의 악연이 시작됐다. 한국시리즈 '단골 손님' 삼성은 1986년에도 그 무대에 섰다. 하지만 또 준우승. 박철순, 최동원에 이어 해태의 선동열에게 막혔다. 한국시리즈 도중 대구에서 해태 구단 버스에 불이 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최강'이라는데 '2등'이란 꼬리표도 따라붙었다. 계속 해태에 덜미를 잡혔다. 불펜에서 선동열이 몸을 풀기만 해도 대구시민야구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관중석에 있던 소년도 그랬다. 불과 몇 m 앞에서 불펜 투구하는 모습은 강렬했다. 그 공을 보곤 바로 짐을 쌌다.

1980년대 중후반 삼성 라이온즈의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왼쪽부터). 삼성 제공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을 달성한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이 대구시내 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삼성 제공

◆호랑이 피 수혈해 정상 정복

1990년 겨울 극기훈련에 나선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 당시만 해도 이런 훈련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삼성 제공
1980년대 중후반 삼성 라이온즈의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왼쪽부터). 삼성 제공

1990년 포스트시즌. 삼성은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와 해태를 연파,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또 정상을 눈앞에 두고 무너졌다. LG 트윈스에 4연패. 삼성의 여섯 번째 준우승. '다신 야구 안 본다'는 아버지의 말이 소년의 귀에 오래 남았다.

삼성은 일찍 선진 야구에 눈을 떴다. 국내 최초로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명문 LA 다저스와 접촉했다. 그들의 스프링캠프장인 플로리다주 다저 타운으로 전지훈련을 간 게 1985년. 짜임새 있는 수비 시스템, 웨이트 트레이닝 등 새로운 기술 이론을 접목했다.

1994년 삼성 라이온즈 주축 선수들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성래, 우용득 감독, 류중일, 이만수, 이종두, 김상엽, 강기웅, 양준혁. 삼성 제공
1990년 겨울 극기훈련에 나선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 당시만 해도 이런 훈련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삼성 제공

좋았던 삼성 내야 수비는 더 단단해졌다. 이런 흐름은 리그 수준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순 없었다.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이듯, 프로라면 우승 트로피가 필요한 법. 삼성은 1991년과 1992년에도 포스트시즌에만 나갔을 뿐, 정상에 서지 못했다.

1993년, 소년은 고3이 됐다. 여름 어느날 , 소년은 야간자율학습을 '제꼈다'. 야구장에서 회포를 풀고 귀가하니 어머니가 한 마디했다. 야구 잘 봤냐고. TV 중계 화면에 체크 무늬 교복을 입은 채 환호하는 소년의 모습이 잡혔단다. 신예 양준혁이 홈런을 쳤을 때였던 모양. 그렇게 신나 보이는 모습은 오랜만이라 했다.

1990년대 중반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모습. 삼성 제공
1994년 삼성 라이온즈 주축 선수들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성래, 우용득 감독, 류중일, 이만수, 이종두, 김상엽, 강기웅, 양준혁. 삼성 제공

그럴 만했다. 그해 삼성은 야구를 잘했다. 그리고 다시 한국시리즈에 나갔다. 상대는 '숙적' 해태. 학교에서도 TV로 경기를 보여줬다. 수능시험이 처음 도입돼 1차 시험이 8월 치러졌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2차 시험을 준비한다는 학생들은 교내 도서관으로 갔다.

소년은 당연히 3차전을 택했다. 잊기 힘든 명승부. 신인 박충식의 투혼이 빛났다. 무려 181구를 던졌다.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 등 해태 투수 3명을 홀로 상대했다. 15이닝 2실점 완투. 결과는 2대2 무승부였다. 그게 끝. 삼성은 또 해태에 정상을 내줬다.

1997년 7월 8일 올스타전에서 만난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과 해태 타이거즈의 이종범. 삼성 제공
1990년대 중반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모습. 삼성 제공

소년도 청년이 됐다. 대학과 군대를 거치며 야구와 잠시 멀어졌다. 그래도 대학 도서관에 가면 늘 스포츠신문을 먼저 찾았다. 야구 기사를 샅샅이 훑었다. 1995년 입단한 이승엽은 삼성 팬들의 희망. 1997년 32홈런으로 홈런왕에 올랐다. '국민타자'가 나타났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가 등장했다. 현대는 삼성의 오랜 재계 라이벌.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뒤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돈보따리를 화끈하게 풀며 수준급 선수들을 데려와 1998년 우승을 차지해버렸다. 삼성도 가만 있을 순 없었다. 해태에서 임창용을 데려왔다.

삼성 라이온즈의 김응용 감독. 삼성 제공
1997년 7월 8일 올스타전에서 만난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과 해태 타이거즈의 이종범. 삼성 제공

그것만으로는 안되자 '승부수'를 던졌다. 2001시즌을 앞두고 해태 출신 명장 김응용 감독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한국시리즈에서 9번 우승한 인물. 그 중 3번(1986, 1987, 1993년)은 삼성이 희생양이었다. 그럼에도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또 좌절했다.

2002년 여름, 한일 월드컵이 열렸다. 한국의 4강 쾌거에 야구광 청년도 환호했다. 그리고 가을, LG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이승엽의 동점 3점포에 이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사자가 마침내 포효했다. '우승 청부사' 김응용 감독과 함께. 소년, 아니 청년도 목이 쉬었다. 오랜 응어리가 풀렸다.

삼성 라이온즈의 김응용 감독. 삼성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