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 격동 80년]국토의 대동맥, 7월7일 완전 개통

입력 2026-06-19 12: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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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장 428km, 번영의 동맥 '1일 생활권'
朴 대통령, 1967년 대선 승리 후 건설 강행
7일 대구종합운동장 개통식, 박정희 부부 참석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와, 건설 담당 기업체 사장들을 실은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위해 출발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와, 건설 담당 기업체 사장들을 실은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위해 출발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7일 대구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참석했다. 매일신문 DB
7일 대구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참석했다. 매일신문 DB

"서울→ 대전→ 대구→ 부산"

1970년 7월7일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됐다.경부고속도로는 단순한 도로 건설 사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끌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수단은 철도와 국도였지만,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했다.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항구로 운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물류비도 높았다. 정부는 산업 발전을 위해 전국을 신속하게 연결하는 대동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수도 서울에서 출발해 대전을 지나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뻥 뚫린 고속도로가 놓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들어간 비용은 총 429억원, 1㎞당 약 1억원의 공사비가 들었다.1970년 우리나라 예산 규모가 약 3,000억 원 수준이었으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국가예산의 약 14%에 해당하는 거대한 사업비였다.전체 공사에 들어간 철근만 4만8천여t, 시멘트 663만여 포 등 엄청난 자재가 대량 투입된 초대형 국책 사업이었다. 가장 어려운 공사는 현재 유명한 휴게소가 있는 추풍령 구간었다고 한다. 특히 당재터널을 뚫을 때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서독을 방문해 아우토반을 둘러본 후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갖게 됐다. 연합뉴스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서독을 방문해 아우토반을 둘러본 후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갖게 됐다. 연합뉴스

◆朴 대통령, 1967년 대선 승리 후 건설 강행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서독 방문 길에 아우토반(고속도로)을 둘러보고, 독일 경제부흥의 배경에 고속도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고 전국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갖게 됐다.

이후 1967년 제6대 대선을 앞둔 4월 29일 서울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라 일컬어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그 해 10월에 국토개발 전문가인 주원 건설부 장관을 발탁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본격 추진하게 된다. 12월에는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와 산하 계획조사단을 설치하고, 청와대 파견단까지 보내 직접 챙겼다. 1968년 2월 1일 기공식이 열렸으며, 대역사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야당에선 반대가 심했다. 김영삼 신민당 원내대표는 나라 재정 파탄과 경제적 비효율성을 문제 삼아 반대 당론을 정했으며, 김대중 국회의원은 국가 균형발전 차원에서 반대 깃발을 들었다. 김 의원은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남북종단 철도와 도로에 치중했기 때문에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교통망"이라고 반발했다.

국민 여론도 나빴다. 일부 소수만이 자동차를 소유했을 뿐더러 부유층 일부 사람들만 누릴 호화 시설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던 것. 당시 IBRD 보고서도 "자동차 보유 대수가 얼마 안 돼, 경제성이 적다"며 경부고속도로 시기상조론을 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발전에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였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다음날인 7월8일자 본지 1면. 매일신문 DB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다음날인 7월8일자 본지 1면. 매일신문 DB

◆동양 최장 428km, 전국 '1일 생활권'

1970년 6월 30일자 본지 3면에 실린 경부고속도로 건설 관련 기사의 제목이 이채롭다. '한숨에 돌관(突貫)한 남북천리(南北千里)'. 한자 '돌관'은 돌파하고, 관통한다는 뜻이다. 이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은 7일 7일 정오 대구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개통식이 대구에서 열린 것은 고향이 구미인 박 전 대통령의 뜻이 반영됐다.

개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5만여 명의 시민이 참석해 국토의 대동맥 연결을 축하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로 다져진 민족적 예술작품"이라며 "국가 경제발전과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7월 8일자 본지 1면 톱기사는 '경부고속도로 완전 개통, 번영의 동맥 1일 생활권' 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이날 개통식에는 경북여중 학생 2천여 명의 카드섹션이 펼쳐지고, 계성고와 신명여고(현 신명고) 학생들이 합창으로 '대통령 찬가'를 부르기도 했다. 축하 공연과 함께 고속도로 건설유공자 190여 명에 대한 표창도 했다. 이날 밤에는 대구시민들과 함께 한 불꽃놀이 행사도 진행됐다.

한편, 이날 대구종합운동장 동문 쪽에는 시민들이 입장하던 중 경찰이 갑자기 제지하면서, 사람들이 밀리고, 넘어지고, 밟히는 사고가 발생해 당시 23명의 시민이 중경상(18명 중상)을 입는 압사사고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