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초나라 영(郢)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밤늦게 연(燕)나라 재상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그는 촛불을 든 하인에게 무심코 "촛불을 높이 들어라"라고 명하였다. 어이없게도 옆에서 구술(口述)을 받아 적던 이가 이 말까지 편지의 내용으로 오인해 그대로 기록해 버렸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연나라 재상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그는 '촛불을 높이 들어라'라는 말을 '밝음을 숭상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한술 더 떠서 '현자(賢者)를 발탁해 임용하라'는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로 오독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 역시 이 견강부회(牽強附會)를 받아들여 인재를 고루 등용했고, 결과적으로는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영(郢) 땅의 사람이 쓴 편지를 연(燕)나라 사람이 해설하다'라는 의미인 '영서연설(郢書燕說)'의 이야기이다. 결과만 보면 해피엔딩 같지만, 한비자의 본뜻은 다른 데 있었다. 한비자는 본래의 맥락과 완전히 딴판으로 글을 뜯어 맞추고, 존재하지도 않는 숭고한 의미를 천착하는 학자와 정객(政客)의 허위의식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영서연설'의 덫에 걸려 있다. 본래의 맥락과 의도는 사장된 채, 저마다의 이념과 이익에 맞춰 가공한 자의적 해석과 아전인수(我田引水)가 공론(公論)의 장을 지배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분야는 단연 정치권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는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말꼬리 잡기'와 '자의적 해석'의 경연으로 전락하였다. 어떤 정치인의 발언이나 정책적 제언의 본질은 간데없고, 상대 진영은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왜곡한다. 국민이 겪는 실질적인 고통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정책을 둘러싼 명분론적 해석만 무성하다.
한비자가 지적했듯, 잘 다스려진 것은 우연한 다행일 뿐, 편지의 본래 의도가 아니다. 나쁜 결과를 좋다고 우기거나 요행에 기대는 정치는 본질적 문제들을 시야에서 가려 버린다.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하는 것은 미디어 환경이다.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은 대중을 저마다의 '영서연설'이라는 확증편향 속에 가두어 버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에서 '오독(誤讀)'은 일상이 된다. 누군가 던진 평범한 글귀나 영상은 소셜미디어를 거치며 순식간에 맥락이 난도질당하거나 극단적으로 찬양받는다. 타인의 말과 글을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에 맞춰 과도하게 축소하거나 부풀린다. 타인의 의도를 지나치게 좋거나 나쁘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소통이 단절된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할 공론의 장은 사라지고, 서로를 향해 "내 해석이 옳다!"고 외치는 확성기의 소음만 가득하다.
연나라가 영 사람의 편지로 인해 일시적인 번영을 누렸을지언정, 그것은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우연에 기댄 행정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고, 본질을 비껴간 소통은 결국 오해와 갈등의 불씨를 남기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억지로 꿰맞춘 거창한 해석이 아니라,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직시(直視)의 용기'이다. 정치인은 상대의 말을 왜곡해 공격하기 전에 그 정책이 지닌 진짜 문제와 효과를 따져야 한다. 그리고 대중은 자의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타인의 목소리를 맥락 속에서 온전히 들어야 한다. 맥락이 사라진 사회는 가짜 풍요 속에서 눈이 멀어버릴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