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살 중학생, 아버지 이름 한자 몰라 이웃집에 물어 지원서 작성
낙동강 방어선 지킨 경북 학도병들… 91세, 93세 생존자가 들려준 전쟁의 기억
1950년 여름. 경주의 한 중학생은 부모에게 "대구에 배구 시합이 있다"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
친구들과 운동 경기를 하러 가는 줄 알았던 부모는 아들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하지만 소년의 목적지는 경기장이 아니었다. 북한군이 남하하는 전쟁터였다.
올해 93세인 윤원덕 어르신은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경주공업중학교 4학년이던 그는 상급생들이 학도병 지원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부모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경주역으로 향했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경주 건천역을 지날 때 플랫폼에는 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윤 어르신은 이날에 대해 "어머니는 내가 전쟁에 간다는 사실을 모르셨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어머니는 손을 흔들었고 아들은 창밖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전쟁은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다. 서울은 불과 사흘 만에 함락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방어선은 대구와 경북 일대였다. 영천과 안강, 기계, 포항, 다부동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올해 91세인 정병채 어르신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경주중학교 3학년이던 정 어르신은 교장의 훈화를 듣고 참전을 결심했다. 지원서를 작성하려고 했지만 아버지 이름의 한자를 몰랐다. 결국 이웃 아주머니에게 몰래 물어본 뒤 원서를 완성했다. 아직 부모 품을 벗어나지 못한 열여섯 살 소년이었다.
대구 신병교육대로 향한 학생들은 총기 훈련을 받은 뒤 곧바로 실전에 투입됐다. 교과서를 펼치던 손에는 소총이 쥐어졌고, 학교 운동장을 뛰던 발은 군화를 신고 전장을 누볐다.
정 어르신이 배치된 곳은 안강·기계 전투가 벌어진 비학산 일대였다.
전투 중 그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함께 싸우던 선배 한 명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동료 학생은 그의 주머니에서 태극기를 꺼내 몸 위에 덮어줬다. 태극기가 흔들리는 것을 본 소년들은 "아직 살아 있다"고 외쳤기도 했지만 총알은 이미 선배의 목을 관통한 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는 숨을 거뒀고 정 어르신 역시 머리에 파편상을 입었다. 옆에 있던 친구는 한쪽 손을 잃었다.
윤 어르신의 전쟁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첩보부대에 배속돼 안동과 영천, 군위, 홍천 등을 오가며 인민군의 이동 경로와 병력 규모를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복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적진을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해야 했던 위험한 역할이었다.
상주국민학교에 집결했던 학생들이 허기를 달래고자 큰 통에 담긴 주먹밥을 서로 집어 먹던 기억도 남아 있다. 밥은 금세 으깨졌고 학생들은 손가락에 붙은 밥풀까지 핥아먹으며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전쟁은 소년들의 시간을 앗아갔다.
누군가는 전장에서 생을 마쳤고 누군가는 평생 몸속에 파편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학적부에는 '징집 입대', '상이제대', '종군 중 복교'라는 짧은 기록만 남았지만 그 몇 글자 뒤에는 친구를 잃고 꿈을 잃은 학생들의 삶이 숨어 있다.
정병채 어르신은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간 것은 보람 있게 생각한다"면서도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참전한 일은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윤원덕 어르신 역시 후배 세대에게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경북교육청은 이들의 증언과 기록을 수집해 학도병 기록물 전시회 '소년의 시간'을 본청 1층에서 운영하고 있다.
75년 전 교실을 떠난 소년들은 이제 91세, 93세의 노인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열여섯 살, 열일곱 살 학생들이 살아 있다. 총을 들었던 학도병이 아니라 친구와 미래를 이야기하던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