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론새평-오정일] '잠실 소요(騷擾)'에 관한 단상(斷想)

입력 2026-06-17 08:5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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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6월 5일 경찰과 서울시 선관위가 잠실 투표소의 투표함 2개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게 됐다. 배현진 의원은 이를 '소요'라고 했다. 여러 사람이 소란을 일으키거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소요'다.

투표용지가 부족해서 일부 유권자가 제대로 투표하지 못했다. 중앙선관위는 투표율이 높아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다고 한다. 작년 12월 중앙선관위는 축소 인쇄 필요성이 있는 경우, 유권자의 50%를 하한(下限)으로 잡고 조정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광주시와 세종시는 이 지침을 잘 따랐다. 유권자의 50%만 인쇄했다. 잠실이 속한 송파구 51%, 인천시 53%, 서울시와 경기도는 58%를 준비했다.

슬랙(slack)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원이나 능력을 한계까지 사용하지 않고 남겨 둔 여유분을 뜻한다. 얼핏 보면 슬랙은 낭비다. 효율을 극대화하려면 슬랙을 줄여야 한다. 인력, 예산, 시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조직이나 시스템은 불확실성에 노출된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일이 지연(遲延)되거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슬랙이 없는 조직이나 시스템은 작은 충격에도 크게 흔들린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려면 슬랙이 있어야 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선거에 있어서 여분(餘分)의 투표용지는 낭비가 아니다.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버퍼(buffer)다. 모든 유권자가 투표한다는 가정하에 투표용지를 인쇄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슬랙이 있는 것이 효율적일 때가 많다.

2017년 수능시험 날 포항시에 지진이 발생했다. 포항시 일대 시험장이 파손됐다. 포항시 응시생(應試生)만 나중에 시험을 칠 수는 없었다. 수능시험은 1주일 뒤로 연기됐다. 1주일 만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다. 2018년부터 수능 문제를 2세트 준비한다. 출제 기간이 3주에서 5주로 늘어났고 비용도 증가했다. 2018년부터 작년까지 수능시험 날에 지진은 없었다. 매년 수능 문제 1세트가 폐기됐다. 이는 낭비인가?

비슷한 일이 매년 경북대에서도 발생한다. 논술시험의 경우 지원자의 절반은 결시(缺試)다. 다시 말해 논술시험 응시율은 50%다. 많은 대학이 같은 날 논술시험을 치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북대는 응시율 100%를 가정하고 문제지와 답안지를 인쇄한다. 시험장과 감독관도 확보한다. 이 모든 것은 비용이다. 올해부터 지원자의 60%만 인쇄하면 어떤가? 불안하다면 70%는?

'잠실 소요'의 직접적 원인은 투표용지 부족이다. 선관위는 슬랙을 확보했어야 한다. 사실 투표용지 부족은 단순한 행정 미숙(未熟)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2030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번 선거가 공정하지 않았고, 국민의 투표권이 침해됐다고 느낀 것 같다. 공정과 권리. 이것이 '잠실 소요'의 근본적 원인이다.

2030세대는 결과보다 과정과 절차를 중시한다. 과정과 절차는 공정과 직결(直結)된다. 이들은 결과에 빠르게 승복하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쉽게 인정한다.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대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은 대접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 내 권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당하면 참지 못한다.

요즘 학생들은 출결(出缺)에 민감하다. 학생들이 내게 보낸 메일의 대부분이 출결에 관한 것이다. 개인 사정으로 수업에 못 들어갔는데 출석 인정이 되느냐, 5분 늦게 강의실에 들어가서 출석 체크를 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많은 민원(民願)은 시험일이나 학점에 관한 것이다. 시험이 신입사원 연수와 겹치는데 레포트 대체가 가능한가, C인 학점을 C+로 올려줘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없지 않나.

요즘 학생들을 상대하는 요령이 있다. 20년 교수 생활로 체득(體得)했다. 학사 일정을 자세하게 공지하고,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예외를 인정하면 후폭풍(後暴風)이 세다.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빌미를 줬다면 빨리 인정하고 시정(是正)해야 한다. 선관위가 '잠실 소요'의 빌미를 줬다. 속된 말로 2030세대가 긁혔다. '소요'를 진정시키려면 먼저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그다음은 재투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