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실미도 부대 사건
"청와대로 가자." 총을 든 남자들이 버스 기사를 위협하며 출발을 재촉했다. 북한 무장공비도, 범죄 조직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비밀리에 길러낸 북파공작원들이었다. 1971년 8월 완전무장한 채 서울 한복판으로 향한 이들의 행렬은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훗날 '실미도 사건'으로 불리게 된 이 비극은, 사실 3년 전 청와대를 노렸던 북한의 1.21 사태에서 시작됐다.
◆ 보복 위해 비밀부대 결성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해 대통령을 살해하려는 1.21 사태 이후, 정부는 보복을 결심했다. 결심은 빨랐다. 그 해 4월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 김형욱은 북한으로 보낼 특수공작원을 키우고자 실미도에 북파목적의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했다. 소리 소문없이 재빠르고 사나운 '오소리' 마냥 북한에 침투하라는 의미로 '오소리 공작대'라 불리기도 했다.
만에 하나 일을 그르쳤을 때 꼬리를 자르기 위해, 가난한 민간인 31명을 부대원으로 택했다. 상당한 봉급과 장교급 대우를 약속받은 31명은 3개월 간의 훈련을 위해 실미도로 모여 들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 이들에게 가짜 군번을 부여했고, 북파 임무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영종도 옆 작은 실미도에 모인 이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해 등 뒤에서 총을 쏘곤 했다. 가혹한 훈련을 버티지 못해 뼈가 부러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교육대장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 동료를 구타하기도 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7명의 부대원이 사망했다.
◆ 갈 곳 잃은 '오소리' 부대원
약속한 3개월이 지났지만 실제 침투 작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되는 등 화해정국으로 돌아서서다. 미국 역시 남과 북의 갈등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당시 닉슨 정부는 중국과 핑퐁 외교를 펼치며 평화 분위기 조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 가운데 북파공작원의 파견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북과 대립해야 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부대는 해체되지 않았다. 부대원의 존재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휴가나 가족과의 교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들은 섬 안에 방치된 채 3년 4개월이란 시간을 보냈다. 약속했던 봉급과 대우는 받지 못했고, 군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점점 열악해졌다.
◆ 북 아닌 서울로… 실미도 탈출
축적됐던 분노는 1971년 8월 23일에 폭발했다. 부대원들은 숨겨 뒀던 소주를 나눠먹다가 들킨 것이 계기였다. 비인간적 대우를 견디지 못한 부대원들이 총을 들었다. 결국 섬에 주둔해 부대원들을 관리하던 기간병 18명이 총격 중 숨졌다. 부대원들은 기간병의 시체를 뒤로하고 섬을 빠져나갔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고발하겠다는 일념으로 부대원들은 서울로 향했다. 민간인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탈취해 한창 가던 중, 군과 경찰을 마주했다. 지금의 서울 동작구 대방동 일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조여드는 포위망에 방도를 찾지 못한 부대원들은 수류탄을 터뜨렸다. 귀청이 떨어질 만큼의 굉음이 터진 뒤, 살아 남은 건 4명의 부대원뿐이었다.
사건에 휘말려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도 목숨을 잃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자, 정부는 부랴부랴 기밀 사수에 나섰다. 생존자 4명에게 "사건에 대해 함구하면, 월남전에 보내주겠다"며 회유에 나섰다. 언론에는 공군 산하의 특수범들의 폭동이라고 알려, 진실을 왜곡했다.
◆ 탈출 결말은 비극… 전원 사망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다음 해 3월 10일, 입을 걸어 잠갔던 생존자들은 모두 사형당했다. 또 이들에 대한 처분은 비공개 군사 재판으로 처리해 입단속을 시켰다. 부대원들이 사형당하는 그 순간에도 결국 가족들은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어느덧 30년이 넘게 흐른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실미도 사건을 파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 날의 진실이 드러났다. 위원회는 사망한 부대원들의 유해를 찾아 신원 조회에 나섰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서울 침입 뒤 살아남았던 4명의 사형수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
국가는 이들을 만들었지만, 그 필요가 사라지자 존재마저 지우려 했다. 실미도 사건은 단순한 폭동도, 우발적인 참극도 아니었다. 남과 북의 갈등이 만들어낸 국가폭력의 결과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묻혀 있던 진실은 드러났지만, 희생자들이 겪어야 했던 시간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