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되어도 전쟁 기억만은 또렷…수차례 죽을 고비 넘긴 두 참전용사 [커버스토리]

입력 2026-06-06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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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살아있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주민번호보다 군번 먼저 기억 "북진(北進) 때 신나"
"어찌 우리 이 날을…." 김춘원(95)·이동철(93)

김춘원(사진 왼쪽 95)·이동철(93)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지난달 27일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권성훈 기자
"그때 전우들이 있었기에 내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지." 한 참전용사가 호국영령비앞에서 전우들을 위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AI로 생성한 이미지

전쟁은 역사가 됐지만, 기억은 아직 살아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시작된 비극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 격랑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낸 참전용사들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부동의 능선에는 아직도 치열했던 전투의 기억이 남아 있고, 영천호국원에는 이름 모를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대구·경북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지였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 전쟁의 아픈 기억을 들어본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들의 나이는 100세가 가까워지고 있지만 당시 전쟁터에서의 기억은 너무도 또렷하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훌쩍 지났건만 당시의 기억은 어찌 그리도 생생할까. 매일이 일촉즉발(一觸卽發), 생사(生死)를 오갔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들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바로 옆 전우가 쓰러지고, 시체가 쌓인 참호 속에서 적군과 싸워야 하는 그 처절한 현장을 겪어보지 않고, 어찌 가늠이나 할까. 전쟁터는 일상이 갑작스런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전쟁 세대의 뇌리 속 기억은 강렬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그 호국 영령들의 희생 위에 자유를 누리고, 세계 속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한강의 기적', '낙동강의 기적'은 전쟁의 폐혜를 딛고 일어선 한민족의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준 쾌거다. 본지는 살아 있는 증언을 기록하고, 대구·경북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을 찾아 전한다.

6.25 전쟁에 참전한 당시의 김춘원 용사. 김춘원 씨 제공
김춘원(사진 왼쪽 95)·이동철(93)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지난달 27일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권성훈 기자

♬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지부장 임채환)의 추천으로 지난달 27일 한국전쟁 두 참전용사를 만났다. 1931년생 김춘원 씨와 1933년생 이동철 씨. 백수(百壽, 100세)를 바라보는 노병(老兵)이지만 전쟁 당시를 떠올릴 때의 눈빛만은 혈기왕성한 전장의 전투병이었다.

"지금 살아있는 것도 꿈인지, 생시인지…."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보여준 두 용사의 애국심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휴전을 한 지, 73년이 흘렀건만 둘의 기억 속에는 전쟁의 아픈 상흔이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두 용사 모두 화랑 무공훈장을 받고, 국가로부터 매월 무공영예수당(55만 5천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나라의 안보관과 군인들의 전투태세에 대해서는 큰 우려를 했다.

'신의 가호'인지, 더 큰 기적으로 생각된 것은 두 용사가 수십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아직까지 정정하게 살아계시다는 것 뿐 아니라 총알이 빗발치는 고지전 전투에서도 단 한발도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6·25 전쟁 당시의 기억을 소환해 적은 이동철 참전용사의 일기장. 이동철 씨 제공
6.25 전쟁에 참전한 당시의 김춘원 용사. 김춘원 씨 제공

◆9706561, 수색병 김춘원

군인에게 군번은 생존 확인증이나 다름없다. 그 때문일까? 김춘원 용사는 주민번호보다 군번을 더 확실하게 외우고 있었다. 자판기처럼 이름만 대면 바로 군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의 6·25 전쟁 스토리는 한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고향이 의성인 그는 18세에 결혼을 했다. 1949년에 태어난 김완준 경주 예술의전당 관장이 큰 아들이다. 고향에서 임시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홍익대 정경학과(정치경제)에 편입시험을 치고, 서울 아현동에서 자취를 하는 중에 전쟁이 터졌다. 북한 인민군은 3일 만에 남하해 서울을 함락시켰다.

뒤늦게 전쟁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씨는 친구들과 고향(의성)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경기도에서 인민군에 붙잡혔다. 하지만 전쟁터에도 휴머니티는 살아숨쉬었다. 인민군은 "학생들인데 그냥 보내줘라"고 풀어줬고, 그 길로 중앙선 철도를 따라 고향까지 한걸음에 도망쳤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 씨는 교편 생활을 그만두고 8월 25일에 군에 입대했다. M1 소총을 몇 차례 분해·결합하고, 간단한 집체교육과 함께 실전 전투에 투입됐다. 이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겪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부터 국군의 북진(서울 수복)과 함께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1·4 후퇴까지.

3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1.국군이 북진하다 평북 희천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 #2. 묘향산에서 적들에 포위되어 일주일 가량 고립됐다 구사일생, #3. 파라호 전투에서 능선을 횡단하다 집중사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쟁통에 총알 한발 맞지 않은 행운에 대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각오"라고 회고했다.

그는 매년 6월이 되면 당시 영천 화산전투에서 수색대를 이끌던 홍재익 소령, 홍덕숭 선임하사, 그리고 김재경, 장병국, 현용환, 남상욱, 이규직 등 전우들이 생각난다. 더불어 전쟁터에서 숨진 고향 친구들, 군번조차 받지 못한 채 적의 공격에 숨진 전우들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이제는 6·25 참전용사도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지껏 살아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척추 쪽에 석회가 생겨나 다리 아래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참전용사로서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 그 교훈을 후세에 알리는 일에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김춘원(사진 왼쪽 95)·이동철(93)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다. 권성훈 기자
6·25 전쟁 당시의 기억을 소환해 적은 이동철 참전용사의 일기장. 이동철 씨 제공

◆3701295, 정보병 이동철

"어리다고 안 받아주나요?"

4남 3녀의 둘째로 태어난 이동철 참전용사는 6·25 발발 당시 18세 청년으로 자원입대를 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모병소에서 받아주지 않자 한달여 후에 다시 찾아가 "나라를 위해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떼를 쓰면서까지 결국 군에 입대했다.

기초 군사훈련을 3일 받고,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했던 영천 화산전투에 실전 투입됐다. 능선을 점령하기 위한 고지전을 펼치고, 적의 후방 교란 작전까지 담당했다. 그는 "시체가 곳곳에 즐비했다. 불도저로 시체를 치울 정도였고,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죽었는지 모른다"고 눈물로 회상했다.

이 용사는 놀랍게도 6·25 전쟁 당시의 기억들을 소환해 일기장 형식으로 다 정리해 놓았다. ▷조국수호를 위한 입대, 1950년 8월 ▷칠곡 다부동에서 영천 신령으로, 8월 말 ▷38선을 돌파한 날, 10월 ▷드디어 평양에 입성, 10월18일 ▷중공군이 공격해오던 그날 밤, 10월25일 등.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신나게 압록강까지 북진을 하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군위에서 시작해 선산→상주→노량진→한강→고양→파주→임진강→고란포→평양→대동강→온산 등을 거쳐 중공군이 개입할 때까지 북녘 땅까지 밟았다. "그 당시에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제 다시 가볼 수 없는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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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원(사진 왼쪽 95)·이동철(93)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다. 권성훈 기자

1950년 마지막날도 잊을 수가 없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에서 계속 후퇴하다 임진강 적성면 일대에서 7명의 수색 분대가 적의 기습을 받아, 인근 산으로 도망가 다행히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생존했다. 적으로부터 총알 세례를 그렇게 받았지만, 운 좋게도 아무도 총상을 입지 않았다.

그는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을 이끈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존경한다. 당시 국군 1사단과 미군 병력은 8월 초부터 약 한달 동안 대구 북쪽 약 20km에 이르는 칠곡군 다부동에서 남침하려는 북한군 3·13·15사단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낙동강 방어선을 잘 지켰다. "지금도 다부동 전적기념관 앞에 백선엽 장군 동상을 보면, 또다시 가슴이 뜁니다."

이 용사는 전쟁이 끝나고 결혼해 2남2녀를 낳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제일모직에 입사해 15년 정도 근무했으며, 윤활유 관련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평탄한 삶은 없고, 늘 도전과 시련이 뒤따랐다"며 "전쟁터에서의 경험은 평생 강렬하게 남아 아직도 생에 힘을 준다"고 말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서울 거리에 등장한 북한 인민군 전차. 매일신문 DB
6'25 전쟁 경과도. 출처=전쟁기념관 오픈 아카이브
1950년 12월 23일 한국전쟁 흥남철수 당시 흥남항에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 탄 북한 피란민들. 로버트 러니 당시 미 해군 장군 제공
6.25 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서울 거리에 등장한 북한 인민군 전차. 매일신문 DB

◆두 용사가 말하는 6·25 전쟁 "생지옥"

두 참전용사가 전하는 한국전쟁의 기억은 "생지옥"이라는 세 글자로 요약된다. 한 생명이 그저 하루 아침의 이슬처럼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적군을 앞에 두고,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한다.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총상을 당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전쟁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극적인 일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김춘원 용사는 "젊음을 나라에 바쳐 구국 전선에서 초개와 같이 산화한 전우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며 "우리 다음 세대는 다시는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동철 용사도 "전쟁터에서 무명의 용사로 죽은 이들이 너무 많다"며 "우리가 누리는 자유대한민국의 번영과 평화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대구시 교육청(교육감 강은희)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가 발간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참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전쟁증언록'을 펴낸 김춘원 편집위원장은 "개인이든 국가든 힘이 없으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며 "전쟁을 교훈삼아 경제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국민이 단합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철 용사도 "요즘 젊은이들이 정신적으로 너무 나약한 것 같다"며 "너무 편한 것만 찾으려 하고, 희생하지 않으려 한다면, 전쟁 중에 누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겠느냐. 국가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존경하고, 예우하는 애국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1950년 12월 23일 한국전쟁 흥남철수 당시 흥남항에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 탄 북한 피란민들. 로버트 러니 당시 미 해군 장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