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근대사] 항일 언론인 베델의 추악한 정체

입력 2026-06-01 11: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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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으로 취업해 한반도로 와
재판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 1909년 5월 37세로 급사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그는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정의의 필봉을 휘두르다 37세의 나이에 요절한 애국적 항일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그는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정의의 필봉을 휘두르다 37세의 나이에 요절한 애국적 항일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과 조계사 사이에 수송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3·1운동 민족대표 중의 하나인 이종일 동상이 서 있고,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터, 숙명여학교 옛터, 중동학교 옛터, 대한매일신보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창간한 항일 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베델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정의의 필봉을 휘두르다 37세의 나이에 요절한 애국적 항일 언론인으로 회자되고 있다. 미안하고 서글픈 얘기지만, '역사적 사실(historical)'은 이와는 너무도 다르다. 통감부의 비밀 수사보고서, 영국 상해고등법원의 재판 기록과 금융 거래 추적을 통해 '펜으로 일제에 맞선' 항일 영웅 베델의 신화를 발가벗겨 본다.

1872년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틀에서 태어난 베델은 고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자 10대 후반, '기회의 땅' 일본에 진출한다. 고베에서 영국산 면직물·잡화 무역상으로 일했으나 치열한 경쟁에 밀려 파산 위기에 처한다. 1904년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던 시기에 발발한 러일전쟁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 특파원으로 취업하여 한반도로 건너왔다.

당시 대한제국은 격동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불안한 정세, 어리숙한 지도부, 문란한 사회 질서의 틈새에서 망국의 기운이 싹 터 올랐다. 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한 영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전폭 후원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봉쇄했다. 러일전쟁 종료 후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가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일본은 대한제국과 1904년 제1차 한일협상을 체결하고 일본의 재정 전문가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대한제국 재정 고문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국고를 사유화했고, 공직과 지방 수령 자리는 매관매직으로 채워졌다.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산 지방 수령들은 아전들과 결탁해 과세 농지 경작면적을 고의로 축소 신고하여 세금을 대거 착복했다. 그 결과 세입의 3분의 2가 탐관오리 주머니에 들어가 정부 재정은 완전 초토화 상태였다. 여기서 철저히 이권을 좇아 움직이는 베델의 모험가적 상인 기질이 제 세상을 만나게 된다.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위촉된 메가타 다네타로. 그는 재정개혁·화폐개혁을 통해 고종과 양반 지배층의 세금 포탈, 백성 등쳐먹는 행위를 근절시켰고, 고종이 국고를 빼돌려 곳곳에 숨겨놓은 황실 비자금을 추적하여 압류했다.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위촉된 메가타 다네타로. 그는 재정개혁·화폐개혁을 통해 고종과 양반 지배층의 세금 포탈, 백성 등쳐먹는 행위를 근절시켰고, 고종이 국고를 빼돌려 곳곳에 숨겨놓은 황실 비자금을 추적하여 압류했다.

◆고종과 베델의 공생 관계

메가타 고문은 1906년 10월, 조세징수 규정을 공포하여 지방 수령과 아전의 징세권을 박탈했다. 세금은 중앙정부가 새로 작성한 과세대장을 바탕으로 직접 징수하는 방식으로 개편했다. 그 결과 지세 수입이 3배 가까이 급증했다.

대한제국의 치명적 문제는 극도로 문란해진 화폐 제도였다. 조정은 당백전·당오전·백동화 등을 미친 듯이 발행하여 황실 비자금으로 전용했다. 특히 화폐 제조권을 막대한 돈을 받고 민간 업자에게 넘겨 밀수입 위조 화폐가 판을 쳤다. 1905년 국내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무려 576종에 달했는데, 그중 태반이 밀조된 위조 화폐였다.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메가타 고문은 대한제국 조폐 업무를 폐지하고, 1905년 1월 화폐조례를 공포해 일본 제일은행권을 법정 화폐로 유통시켰다.

여기서 역사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세금 제도와 화폐 개혁은 백성들 입장에서는 황실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끝장내는 축복이었다. 황실과 양반 관리 입장에서 보면 백성들을 등쳐먹는 '젖과 꿀이 흐르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날벼락이었다. 게다가 고종이 국고를 빼돌려 곳곳에 숨겨놓은 황실 비자금을 추적하여 압류에 나서자 고종은 통감부 견제 여론을 조성해줄 인물을 찾던 중 베델과 조우하게 된다.

통감부가 재정 개혁으로 숨통이 조여오자 고종은 막대한 비자금을 제공하여 반일 의병 봉기를 부추겼고, 통감부를 공격할 언론을 물색했다. 베델은 박봉에 시달리며 현장에서 박박 기는 특파원(종군기자)으로 고생하느니 황실의 자금을 지원받아 '항일 언론' 포장을 씌운 신문을 창간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을 마쳤다.

베델은 자신의 영국 국적과 치외법권을 무기 삼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고종에게 거액의 창간 및 운영자금을 요구했다. 비밀 자금 전달의 중간 창구는 러시아 여성 손탁이었다. 고종은 이 돈을 매개로 베델에게 청부 항일 기사를 요구했고, 베델은 황실 비자금을 받는 조건으로 고종이 원하는 논조의 기사를 써주는 언론 청부업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어두운 거래의 실체는 사료로 증명된다. 정진석 등의 연구에 따르면, 고종이 베델에게 건넨 비자금은 약 2만 원에 달했다. 이는 현재 가치로 최소 15억에서 20억 원에 이르는 액수였다. 통감부 경무국은 밀정을 통해 베델이 정기적으로 황실 측근들로부터 영수증 없이 거액의 뭉칫돈(내탕금)을 수령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실제로 비자금을 배달하던 중간 연락책이 체포됐고, 그가 전모를 자백하면서 고종과 베델 간의 비밀 거래 실체가 드러났다.

베델은 고종에게 받은 자금을 신문사 공금으로 사용하지 않고 빼돌렸다. 영국 상해고등법원의 조사 결과, 베델은 이 돈을 홍콩상하이은행(HSBC)에 개설된 개인 계좌에 예치해 두고, 호화로운 귀족식 생활을 영위하는 데 탕진했다. 그는 시내 한복판 정동 인근에 대저택을 매입해 여러 명의 조선인 하인을 거느렸고, 최고급 위스키와 정찬을 즐기며 사교계의 거물로 행세했다. 베델의 '항일 기사'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숭고한 구국 정신이 아니라, 황실의 검은 비자금을 받고 써 준 일종의 청부 기사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고종의 비자금을 받아 항일 청부기사를 써주었다. 이러한 비밀 거래에도 불구하고 대한매일신보는 아직까지 항일 신문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고종의 비자금을 받아 항일 청부기사를 써주었다. 이러한 비밀 거래에도 불구하고 대한매일신보는 아직까지 항일 신문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국채보상금 횡령의 주범, 베델

베델의 파렴치 행각은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성금 유용에서 절정에 달한다. 민초들은 술·담배 끊고 끼니 굶어가며 모은 눈물겨운 성금을 대한매일신보사에 예치했다. 베델은 자사에 예치된 성금 20만 원 중 3만 원(현재 가치로 약 20억~30억 원)을 횡령했다.
이 돈을 미국인 전기사업 투기꾼 콜브란의 회사와 광산 관련 주식을 매입했고, 호텔을 운영하던 프랑스어학교 교사 에밀 마르텔에게 담보 없이 고율의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불법 대출해주었다. 쉽게 말하면 국채보상금을 빼돌려 고리대금업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이자 수익은 국채보상기성회에 보고하지 않고 베델의 개인 주머니로 들어갔다.

1909년 5월 베델이 사망하면서 이 돈은 회수 불가능해졌다. 민초들이 밥 굶고 담배 끊어가며 모은 돈을 횡령하여 베델과 콜브란, 마르텔은 정동의 고급 사교클럽에서 샴페인을 홀짝이며 성금을 나눠먹은 것이다. 베델의 횡령 실태는 1908년 6월, 영국 상해고등법원의 재판 과정에서 통감부가 제출한 베델의 금융 거래 내역과 압수 수색 자료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영국 법원은 베델에게 '선동 및 치안 문란' 혐의로 3주간의 금고형과 벌금형을 선고했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이 재판 과정에서 무죄 방면된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자금의 실질적 통제권과 계좌 관리 주권이 영국인 베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자금을 위탁받은 지도층의 심각한 내부 부패와 이방인 사기꾼의 파렴치한 횡령으로 자멸한 역사적 참극이었다.

베델 가족 사진. 부인 메리 베델은 남편이 죽은 후 일본 당국에 대한매일신보를 16만 원에 매각하고, 매각 대금을 챙겨 영국으로 돌아갔다.
베델 가족 사진. 부인 메리 베델은 남편이 죽은 후 일본 당국에 대한매일신보를 16만 원에 매각하고, 매각 대금을 챙겨 영국으로 돌아갔다.

◆베델의 사후 일본에 신문사 팔고 먹튀

베델은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로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국내에서는 그가 죽으면서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급사한 사람이 유언을 남길 시간이나 있었는지 의심이 가지만, 그 내용이 더욱 가관이다.

남편이 죽자마자 부인 메리 게일(Mary Maud Gale)은 가장 먼저 남편의 개인 계좌 잔고와 신문사 자산을 사유 재산으로 확보했다. 메리는 남편이 빼돌린 국채보상 성금을 유족 생활비와 변호사 비용으로 유용했다. 성금 반환 요구가 빗발치자 메리는 "남편이 조선을 위해 일하다 사망하여 입은 손해를 성금으로 충당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반박했다.
베델의 미망인 메리와 대한매일신보의 운영권자인 영국인 알프레드 만함(Alfred W. Marnham)은 통감부 외무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비밀리에 매각 협상을 벌였다. 메리는 매각 대금으로 16만 원(현재 가치로 150억~200억 원)을 요구했고, 일본 측은 이를 수용했다.

그런데 통감부가 거액을 들여 이 신문을 매입하는 조건이 흥미진진했다. 첫째, 매각 대금 수령과 동시에 영국인 전 직원은 즉시 한국을 떠나고, 향후 언론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 둘째, 신문사의 제반 시설은 물론 '대한매일신보'라는 제호 일체를 통감부로 이관한다. 셋째, 통감부는 베델 일당이 그동안 저지른 국채보상금 횡령 및 유용에 대해 일체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죄상을 덮고 막대한 현금을 챙긴 베델의 유족과 영국인 동료들은 매각 절차가 완료된 1910년 6월 14일, 본국으로 튀었다. 영국으로 돌아간 메리는 신문사 팔아 챙긴 돈, 빼돌린 국채보상 성금으로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남편 베델을 "약소국의 인권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고결한 언론 영웅"으로 포장했다.

대한매일신보 편집실. 일본에 매각된 대한매일신보는 한일병합 다음날 제호를
대한매일신보 편집실. 일본에 매각된 대한매일신보는 한일병합 다음날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꿔 해방될 때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찬양하는 나팔수 역할을 했다.

한일병합 다음 날인 1910년 8월 30일, 대한매일신보는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꿔 조선총독부 공식 기관지로 데뷔했다. 어제까지 고종 비자금을 받아 '항일' 선동 기사를 썼던 기자들은 하룻밤 사이 총독부의 월급쟁이 기자로 돌변했다. 이들은 해방될 때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찬양하는 나팔수로 맹활약했다.

펜앤마이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