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달 단(檀) 자 들어간 지명이나 산 이름 찾아보기 어려워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면 단목은 만목의 왕
환웅과 단군 단목을 택해 그 아래로 내려와 나라 세웠던 것
◆북경시 밀운현과 단주(檀州)
한국은 단군을 국조로 하고 있지만 정작 한반도에는 과거나 지금이나 밝달 단(檀) 자가 들어간 지명이나 산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중국에는 남북조시대 유신(庾信)이 고조선의 명산이 있다고 말한 지금 북경시 밀운 지역에 단주(檀州)가 있었다. 『태평환우기』는 단주 조항에서 "연나라 동쪽에 어양군이 있었는데 진(秦)나라가 통일한 이후에도 이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어양군이라 했고 한나라 때는 백단현(白檀縣) 등 12개 현을 관할했다. 수나라 개황 18년(596)에 단주(檀州)를 설치했는데 한나라 백단현에서 취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북경시 밀운구 일대에 전국시대에는 어양군, 한나라 때는 백단현이 설치되었고 수나라 때는 단주를 설치했으며 수나라 때 설치한 단주라는 지명은 그곳에 백단산이 있어 거기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단주는 북경시 밀운현의 다른 이름이자 옛 호칭이다.
청나라 건륭황제 때 편찬된 『열하지(熱河志)』에는 단주의 역사와 지명의 의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 당 시대의 단주는 지금의 밀운현인데 모두 백단산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隋唐之檀州 卽今密雲縣 皆從白檀取義)"
북제시대에 백단현을 폐지하고 밀운현에 편입시켰다가 수나라 개황 18년(598) 유주를 분할하여 밀운에 단주를 설치하고 당나라 이후 그 명칭을 계속 사용했는데 명태조 주원장이 집권한 뒤로 밀운 지역에서 단주라는 지명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 『태조실록』에 의하면 주원장이 조선의 사신 권근(權近)에게 지어준 시 가운데 "단군 가신지 오래인데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檀君逝久幾更張)"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이는 주원장은 우리민족의 역사가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황제의 도읍지인 중국 북경 중심지에 조선의 국조 단군을 연상시키는 단주라는 지명이 떡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주원장에게는 달갑지 않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주원장은 북경에 있던 단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단주라는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폐기처분 했다고 여겨진다.
북경시 밀운 지역에서 단주뿐만 아니라 백단현, 백단산, 조선하 이런 명칭들도 지금은 모조리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명태조 주원장 이후 한족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단군조선 역사를 지우기 위한 차원에서 모두 다른 명칭으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대명일통지』, 『기부통지(畿府通志)』, 『밀운현지』 등 여러 중국 문헌들 가운데 밀운현에 백단현, 백단산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북경시 밀운 지역에는 단영(檀營), 백단촌(白檀村), 백단사구(白檀社區), 단주가원(檀州家園) 등 밝달 단(檀) 자가 들어간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어, 지난날 밝달산이 밀운 지역의 명산이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밝달나무 고목이 있던 밝달산에서 지명이 유래한 현재 북경시 밀운구의 단주(檀州)라는 옛 지명은 이곳이 단군의 밝달조선이 건국한 옛 터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여긴다.
◆밀운 8경 중의 백단청경(白檀晴光), 조하신범(潮河信帆)
북경시 밀운현은 역사가 유구한 지역으로서 명승고적이 많은 데 특히 역사상에서 밀운 8경이 유명하다. 청나라 강희 12년(1673)에 편찬된 『밀운현지』에는 '백단청광(白檀晴光)'을 밀운 8경의 하나로 들고 있다. 광서 7년(1881)에 편찬된 『밀운현지』에는 밀운 8경 중의 하나로 '조하신범(潮河信帆)'을 꼽는다.
밀운 8경을 전 8경, 후 8경으로 나누는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 8경에는 '백단청광'이, 후 8경에는 '조하신범'이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맑게 갠 하늘 밝달나무를 향해 비치는 밝은 햇살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단산의 청경이 밀운 8경의 하나가 된 것이다.
조선하의 현재 이름인 조하는 하북성 풍녕현에서 발원하여 고북구, 밀운현을 지나 밀운현 서남쪽에서 백하와 합쳐진 후 조백하(潮白河)라 불린다. 이곳에서는 배를 띄울 수 있을 만큼 물길이 넓어진다. 그래서 조하신범 역시 밀운 8경의 하나가 되었다.
밝달산과 조선하가 모두 밀운현에 있고 그것이 밀운 8경으로 꼽힐 만큼 유명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북경의 밀운 지역을 밝달조선의 발상지로 인식해도 좋을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청나라 시인이 '밀운'이란 제목으로 쓴 시에 등장하는 밝달산과 조선하
청나라때 만주족 납란성덕(納蘭性德, 1655~1685)은 양계초가 세계적인 학자로 추앙했던 왕국유(王國維)가 "북송 이후 제 1인이다.(北宋以來 一人而已)"라고 극찬한 인물이다. 납란성덕이 강희황제를 따라 변방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밀운'이란 제목으로 쓴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온다.
"백단산 아래 찾아온 가을 계곡물은 소리 내며 흐르네, 산의 위치는 조하 최상류에 자리 잡고 있다.(白檀山下水聲秋 地踞潮河最上流)" 납란성덕의 이 시는 우리에게 백단산과 조하가 모두 지금 북경시 밀운 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아울러서 백단산이 조하의 최상류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서 납란성덕이 말한 조하는 송나라 때의 조선하이고 백단산은 밝달산이다.
1,500년 전 남북조시대의 유신은 밀운산이 고조선의 명산이라고 말했는데 청나라 때 납란성덕은 '밀운'을 제목으로 쓴 시에서 밝달산을 밀운 지역의 상징적인 산으로 언급하며 조선하의 최상류에 있다고 하였다.
유신이 생존했던 남북조시대는 현재의 북경시 밀운구 일대에 한나라 때의 백단현이나 수당시대의 단주가 아닌 북위시대에 설치한 밀운군이 있었다. 그래서 유신은 백단산이 아닌 밀운산을 밀운의 상징적인 명산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납란성덕의 '밀운' 시는 지금 하북성 북쪽 조하 상류로부터 북경시 밀운구, 조백하 일대가 단군조선의 발상지였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여긴다.
◆단군조선의 발상지는 중국 북경시 밀운구 일대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신시를 세웠다고 말한 『고기』를 인용했는데 거기서 태백산을 북한의 묘향산이라고 주석했다. 이것이 과연 일연 자신의 직접 주석인지 아니면 조선의 사대주의자가 뒤에 추가한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우리나라의 역대 문헌 가운데서 북한 묘향산의 다른 이름이 태백산이라거나 또는 묘향산에 오래된 밝달나무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한반도 안에는 밝달 단 자가 들어간 지명이나 산 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라의 최치원은 중국의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上太師侍中狀)」에서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잔존세력들이 모여서 북쪽으로 태백산을 의거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 통사라 할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했는데 거기 태백산고(太白山考)에서 최치원의 말에 근거하여 태백산을 묘향산이 아닌 백두산으로 비정했다.
그 뒤 최남선을 비롯한 많은 민족사학자들이 이 견해를 추종하였다. 그러나 백두산은 위치적으로 『산해경』에서 "고조선이 있다"고 한 발해의 모퉁이가 아니고 또한 그 산 위에 밝달나무가 있었다는 믿을만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하가 흐르고 밝달하가 있는 북경시 밀운 지역에는 산 위에 오래된 밝달나무 고목이 있는 밝달산이 있었다. 밝달산이 있었던 북경시 밀운 지역은 전국시대에 연나라에게 빼앗겼고 지금도 중국 영토로 되어 있지만 상고시대엔 이곳이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만리장성 넘어 발해만 북쪽의 고조선 땅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기록들에 따르면 단군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왔다는 그 산은 북한의 묘향산이나 길림성의 백두산보다는 산 남쪽에 밝달나무 고목이 있었던 북경시 밀운의 밝달산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단군조선의 건국 사화(史話)에 부합된다.
중국 학계에서는 원래 밀운현이 설치된 곳인 하북성 풍녕 만주족 자치현 남쪽의 운무산(雲霧山)을 옛 밀운산으로 보는가 하면 북경시 밀운구 남쪽의 서곡산(黍谷山)을 밀운산으로 보기도 하여 통일된 견해가 없다.
그러나 납란성덕의 시에 의하면 조하 상류 풍녕현 동남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운무산을 밝달산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운무산은 연산산맥 북쪽에서 뻗어 나온 산인데 주봉이 해발 2,047미터에 이르는 높은 산으로 조선하의 뒷 산인 연산(燕山)의 제2 고봉이 된다. 서곡산은 북경시 밀운구 남쪽 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산으로 주봉이 해발 648미터에 불과하다. 서곡산은 연산산맥 남단에서 갈라져 나간 산으로서 운무산과는 완전히 다른 산이다.
◆단군조선이 바로 서야 한국사가 바로 선다
환웅과 단군은 왜 여러 나무들 가운데 유독 밝달나무를 택해서 그 아래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을까.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면 단목은 만목의 왕이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는 "단목은 목질이 단단하고 향기가 나며 삿된 기운을 물리친다"라고 하였고 도가의 서적인 『운급칠첨(雲笈七簽)』에는 "단목은 신령한 나무로서 신명과 통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단목은 단단함과 아울러 향기와 신비로운 기운을 모두 갖춘 영목(靈木)이자 신목(神木)이고 성목(聖木)이기 때문에 환웅과 단군이 단목을 택하여 그 아래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단군조선의 발상지를 찾는데 있어 비록 상징적이긴 하지만 굳이 밝달나무 고목이 있었던 밝달산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북경시 밀운현 백단산 기슭에 밝달나무 고목이 있다는 기록을 문헌에서 발견하고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답사를 간 일이 있다.
동네 노인들이 모여있는 밝달촌 마을 회관에 가서 오래된 밝달나무가 있는 산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한 노인이 자기가 그곳을 안다고 하였다. 그날은 날이 저물어 그 집에 가서 자고 다음 날 아침 함께 현장을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노인은 이튿날 아침 태도가 돌변하여 못 가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시골 마을에 외국인이 찾아왔으니 마을 촌장에게 보고를 하였을 것이고 우리의 방문목적을 전해 들은 촌장이 이를 가로막은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때 밝달산의 밝달나무 고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북경의 밝달산, 조선하는 문헌에서만 확인이 가능할 뿐 현재 중국 지도상에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민족의 역사적 시원이자 정신적 뿌리인 발해만 북쪽 북경 밀운 일대에서 펼쳐진 장대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바로 찾아 세울 때 한국사가 바로 서고 오늘 한민족의 대륙과 세계를 향한 새 역사창조도 동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