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의 장소의 사색] 중국인 거리

입력 2026-05-05 16: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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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거리의 터줏대감 복해반점 메인셰프 류홍방 씨.
중국인 거리의 터줏대감 복해반점 메인셰프 류홍방 씨.

대구라는 곳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영남 지역의 우두머리 도시가 아니다. 경남에 속했던 부산은 더 그렇다. 대구와 부산은 경부선 철도가 개설된 뒤, 그리고 6.25 때 피난민들이 몰려든 이후에 부쩍 커진 도시다. 대구에는 내세울 만한 양반 권문세가가 없다. 다 고만고만한 지역의 벌족들이 있을 뿐이다.

달성(대구) 서씨, 경주 최씨, 남평 문씨, 단양 우씨들의 집성촌이 있기는 하지만 달성 서씨를 제외하곤 다 변두리에 있고 또한 대단한 벌문(閥門)이라고 자타공인 인정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안동이나 영양, 경주나 안강, 영덕 영해 쪽으로 나가면 지금도 권문세가의 고대광실(高臺廣室)들이 부지기수로 남아 있어서 옛 영광을 과시하고 있지만 대구 시내에는 볼만한 고택이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중심가에 있던 고택은 새로 증축을 해서 국내에서는 가장 큰 한옥 스타벅스로 사용하고 있다. 도시 중심가에 살던 서씨들도 재력이 좋았지 안동이나 경주 등에 있던 이른바 혈식군자(血食君子, 나라의 법전(國典)으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를 배출할 정도의 이름난 양반 가문은 아니었다.

종로에 자리 잡은 한옥 스타벅스
종로에 자리 잡은 한옥 스타벅스

학문보다는 이재에 밝은 근대적 양반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들 서씨 일문은 그 재력을 사회공헌 쪽으로 많이 사용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지역의 대표 명문이라 할 것이다. 어쨌든 옛날부터 선비들의 활약이 두드러져서 교육문화 도시로 호가 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대구에 관립 학교들이 여럿 세워지면서 경남북 지역의 인재들이 대구로 몰려드는 바람에 교육도시로 성장한 곳이 대구다. 이때만 해도 부산은 대구보다 한 등급 떨어지는 교육, 문화도시였다. 사범학교나 의전(醫專) 같은 것이 대구에는 있고 부산에는 없었다. 당시 도시 서열은 서울, 평양, 대구였다. 새로 학교를 세우면 그 순서로 세웠다.

진골목 석재 서병오선생 생가터
진골목 석재 서병오선생 생가터

그렇다면 대구는 어떤 세력이 주도하던 도시였을까? 상인(商人)이었다. 옛날부터 내륙 물류 중심지로 자리 잡아서 대구 상권의 위세가 대단했다. 저 멀리 광주나 목포까지도 화물차가 수시로 오고갔다. 서문시장의 포목전이나 남성동 약전골목, 인교동 오토바이 골목, 수창동 공구골목, 종로 가구 골목 등은 먼 타지에까지 그 소문이 자자했던 대구의 이름난 상권이었다. 대구는 예로부터 상업도시로 성장해 온 곳이다. 개성상인이 유명하다지만 대구상인 역시 그에 못지 않은 경제 능력, 지역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대구의 집단무의식 안에 잠재된 상인의식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 문화, 교육, 예술, 체육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자양분을 제공하는 일종의 아비투스(habitus, 개인의 취향과 이념을 결정하는 사회문화적 환경 요소)가 되고 있다. 손익 계산이 분명하고 교양주의를 존중하고 예술과 스포츠를 사랑하며 자식 교육에 온갖 열성을 쏟는 것이 바로 그 대구 특유의 아비투스다. 대구 출신 인사들이 서울에 가서 강남땅의 주인들이 되어 있고, 정가에서 큰 활동을 하고 있으며, 행정부나 사법부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키워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글로벌 그룹 삼성의 출발지가 대구라는 사실도 그런 대구의 아비투스를 재삼 상기시키는 한 요소가 된다.

화교소학교터
화교소학교터

그와 함께 또 유명한 상권이 화교(華僑) 상권이었다. 이른바 중국인 거리라는 게 대구에는 있었다. 화교 상권은 서울, 대구, 인천, 부산에만 형성되어 있었다. 상권의 규모를 알려면 화교 학교 유무나 그 규모를 살피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대구에는 화교 소학교와 화교 중학교가 있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면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대학은 대만으로 갔다. 초등학교 다닐 때 옆집에 화상이 하던 중국음식점이 있었는데 그 집 누나가 고등학교 때부터 부산으로 내려가는 걸 보고 그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는데 아버지와 딸이 대화할 때는 반드시 중국어로 하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대구 중국인 거리는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영생덕과 복해반점 두 군데만 화상이 하는 중국음식점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종로 골목에 들어서면 중국 향신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명실상부한 중국인 음식점 거리였다. 지금도 화교소학교와 화상연합회 건물이 종로 한복판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규모를 보면 옛날의 위세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날짜를 정해서 화상 축제가 한 번씩 열리곤 했는데 그런 날에는 길 가운데 포장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축제 분위기를 돋우곤 했다. 모두 지나간 추억이다.

화교소학교 교사
화교소학교 교사

내게는 인천의 중국인 거리도 기억 속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어머니를 따라 인천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친척집이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 뒤편이었는데 그 자유공원 아래가 중국인 거리였다. 지금처럼 번성해지기 전인데 어머니가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양키시장 쪽으로 나들이 갔을 때 나는 그쪽으로 한 바퀴 돌아서 친척집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몇 년 전에 다시 가보니 우리가 묵었던 친척집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적산가옥이 리모델링되어서 <팟알>이라는 카페가 되어 있었다. 옛날 모습이 그대로 보전되고 있었다. 인천과 대구는 근대문화거리 재조명 사업을 통해서 낙후된 구도심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잊힌 역사를 복원해서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재탄생시킨 성공적인 도시재개발 사례로 자타가 공인받는 도시들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를 참조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보기 드문 성공사례라 할 것이다.

화상연합회 건물
화상연합회 건물

어릴 때 경험했던, 유일한 내 엑조티시즘(exoticism, 이국취미)의 발원지인 중국인 거리는 나중에 문학교사가 되어 만난 오정희 작가의 「중국인 거리」라는 소설을 내가 유난히 탐독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오정희 작가의 작품을 심리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도 몇 편 썼는데 그 논문들이 나중에 교수 승진 심사논문으로 제출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된 것도 역시 중국인 거리라는 내 어릴 적 아비투스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중국인 거리」는 여러 중등과정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명작 소설인데 그 마지막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전쟁을 겪고 중국인 거리로 이사 온 한 소녀의 시선으로 출구 없는 삶들이 보여주는 순간순간의 슬프고 빛나는 모습을 포착한 소설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비명과 언제부터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를 들으며 죽음과도 같은 낮잠에 빠져 들어갔다. 내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이었지만 여덟 번째 아이를 밀어내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죄고 있을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초조(初潮)였다." [오정희, 「중국인거리」]

참고로 소설 「중국인 거리」와 관련해서 역사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글이 있어서 모셔온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묘사할 수 없는 대목이 즐비한 이 소설의 제목 '중국인 거리'는 바로 인천차이나타운이다. 인천차이나타운은 1884년 청국조계로 설정된 후, 중국 대륙에서 이주한 상인이 주로 거주했다. 대형 주단포목상점, 잡화상점, 중화요리점 등 크고 작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인천화교의 경제가 가장 왕성했던 1920년대 지나정(차이나타운)은 인천의 가장 번화한 거리의 하나였다. 최근의 '인천차이나타운'이라는 명칭은 1992년 한중 국교 수립 이후 선린동 일대 '중국인 거리'를 해외의 번화한 차이나타운처럼 발전시키기 위해 만든 이름이다." <이정희, 『관행중국』, Vol.125/2021.02>

소설가·대구교육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