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도 기술과 기초 체력, 선택의 문제로 볼 수 있지만 결과는 명확하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2002년 월드컵을 떠올리면 답은 분명해진다.
당시 한국에서는 빠르고 화려한 공격 축구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히딩크는 기술보다 체력, 전술보다 기본기를 택했다. 선수들은 혹독한 반복 훈련을 견뎌야 했다. 평가전에서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매서운 질타가 이어졌다.
그러나 '4강 신화'는 비판을 잠재웠다. 경기 막판까지 무너지지 않는 체력과 조직력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가 승부를 가른 셈이다.
24년 전 그 장면이 지금 산업 현장과 겹쳐 보인다. 인공지능(AI), 로보틱스가 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시장과 정책은 '보이는 성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기업들은 자율주행과 휴머노이드, 생성형 AI 등 빠른 사업화와 가시적 성과를 요구받는다.
이런 화려한 결과의 이면에는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소재·부품·장비, 이른바 소부장 산업이다. AI는 알고리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고성능 반도체와 전력 효율을 좌우하는 소재, 정밀 가공된 부품이 결합됐을 때 성능을 구현할 수 있다.
로보틱스도 마찬가지다. 정교한 소프트웨어와 제어 기술이 있어도 이를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구동기와 센서, 내구성을 뒷받침하는 소재·부품이 없다면 '피지컬 AI'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우리 시장 구조는 여전히 결과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 중심의 산업 생태계 속에서 완제품 기업의 요구에 따라 소재 기업이 움직이는 구조가 형성돼 있다. 납기와 단가, 즉각적인 성능 개선 요구에 대응하는 데는 강점이 있지만, 기술 축적과 선제적 연구개발에는 한계가 있다. 소재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는 것이 아닌 수요에 맞춰 빠르게 대응하는 구조가 고착화된 셈이다.
이에 반해 독일, 일본 등 전통적인 산업 강국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 소재 기업이 주도권을 쥐고 장기간에 걸쳐 기술을 쌓은 덕에 탄탄한 생태계를 완성했다. 단기 수익보다 완성도를 내세우며 특정 분야에서 수십 년에 걸쳐 경쟁력을 확보한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정밀 화학, 장비 기업들이 대표적이고 독일은 정밀 기계와 소재 기술을 기반으로 제조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위기 상황에 더 선명한 격차를 보여준다.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릴 때 기초 기술을 확보한 국가는 충격을 흡수하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는 곧바로 생산 차질을 겪는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수가 된 지금 기초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할 수 있다.
해법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 산업계는 오랜 기간 축적해온 제조 기반과 부품·소재 역량을 갖추고 있다. 기계·금속, 자동차 부품, 섬유 등 전통 제조업에서 다져진 정밀 가공 능력과 현장 대응력은 소부장 경쟁력의 핵심 자산이다.
여기에 로보틱스와 미래모빌리티 등 신산업이 결합되면서 기술 기반을 확장하고 있다. 시선의 전환이 필요하다.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하는 기초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 소부장 기업이 단순한 공급자가 아니라 기술 방향을 제시하는 주체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경기 결과는 스코어에 달려 있지만 승부를 가르는 것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 체력이다. 화려한 성과 뒤에 숨은 기초를 얼마나 단단히 쌓는지가 결국 경쟁력을 좌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