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 유지, 외교·군사 공동 대응 소국 연맹체
시대상황 변하고, 그 변화에 적응 못 한 나라는 붕괴
시대상황은 변하고, 그 변화에 적응 못 한 나라는 붕괴할 수 밖에 없다.
◆낙동강 수로망과 남해가 키운 해양소국 연맹
낙동강의 긴 수로망과 남해의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배경으로, 소국들이 항구를 토대로 성장했다. 가야는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외교와 군사는 공동 대응하는 소국들의 연맹체였다. 이 시스템 속에서 초기의 중심은 현재 김해 지역에서 빠르게 성장한 금관가야였다.
김해의 양동리에 있는 2세기 말의 수장급 무덤에서는 중국제 청동거울 2점과 모방품 7점, 그리고 넓적한 청동창, 굽은 옥, 목걸이 등 일본 야요이계 물품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조금 늦은 시기인 부산의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철제 갑옷과 투구, 마구류, 그리고 150점에 이르는 철정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거울, 청동솥, 호랑이 모양의 띠고리, 발걸이 등 북방계 유물과 원통형·파형(바람개비형) 동기 등 왜계 유물들이 발견됐다. 가야가 중국·북방·일본열도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양 무역망의 허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에 가야계 세력은 대한해협을 넘어 일본열도에 이주나 무역을 넘어, 정치적·문화적 영향력까지 행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와 닮은 건국신화의 흔적, 그리고 가야식 유물의 분포는 이를 뒷받침한다. 가야는 남해안에만 존재한 연맹체를 넘어 남해와 일본열도의 양안을 느슨하게 잇는 국제적인 해양세력이었다.
◆국제질서 재편과 다핵 체제로 재편, 후기 가야의 시작
그런데 4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의 시대상황은 점차 변하였다. 무역의 메카니즘이 달라졌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의 정치환경도 변하였다. 고구려가 남진을 본격화하고, 백제는 일본열도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며 전라도와 남서 해안으로 세력을 넓혔다. 동쪽의 신라도 남부 해양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가야는 왜와의 관계를 통해 무역권뿐만 정치력까지 유지·확장하려 했으나, 주변 강국들의 압박 속에서 점점 불안정한 위치로 밀려났다.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릉비의 기록이 전하듯, 신라는 399년에 가야·왜 세력의 침공을 이유로 광개토태왕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400년에는 고구려군 보기 5만이 남하해 가야와 왜 세력을 격퇴했다. 남해안까지 진군한 고구려군의 공격은 금관가야 체제를 근본적으로 흔든 결정적 계기였다. 가야는 역사의 중심부에서 밀려나면서 소위 '후기 가야'가 시작됐다. 부산의 복천동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부상했다. 대형 고분들에서 발견된 순장의 흔적, 철기와 덩이쇠 등의 유물을 보면 복천동은 재편된 지배집단의 핵심 묘역으로 보여진다. 4호분이나 11호분에서는 갑옷·투구·마구 등 고구려계 요소가 눈에 띈다. 10호분에서는 실전용 말갖춤과 말투구가 확인되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무장과 매우 흡사하다. 반면에 토기에서는 경주계, 즉 신라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복천동 세력은 고구려적인 문화와 신라적인 문화 요소를 함께 수용하면서 후기 가야의 한 축으로 부상한 것이다.
◆대가야의 부상과 아라가야의 분립
그러나 후기가야의 중심에는 낙동강 중류인 고령 지역을 기반으로 부상한 대가야였다. 『일본서기』 등에 등장하는 반파국(伴跛國)을 기반으로 성장한 정치체였다. 금관가야가 해상 무역 중심의 해양국가였다면, 대가야는 남강 유역과 합천의 야로 일대의 철 자원을 기반으로 발전한 내륙형 국가였다. 그러나 고립된 것이 아니라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리적 조건을 활용해 내륙 생산물과 철, 무기, 장신구를 집적·재분배하며 정치적 인 중심지로 성장했다. 대가야는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했고, 심지어는 호남 동부의 남원 등 지역으로 진출해서 서해안 항구를 확보한다. 남해의 중부 해안과 서남 해안의 항구를 연계시킨 것이다. 실제로 479년에는 중국의 남쪽 정권인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 본국왕'으로 책봉받는 등 독자적인 외교권을 행사했다.
또한 뛰어난 기술력이 있었는데, 특히 제철 기술은 대가야가 가진 핵심 경쟁력이었다.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오키나와 해역에서 산출되는 야광조개 유물이 확인됐다. 이러한 사실들은 직접 무역이든 중계 무역이든, 대가야가 남해–동중국해–일본열도를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에 깊이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열도와의 관계도 더욱 깊어졌다. 금동관, 환두대도, 마구류 등 유사한 유물들이 일본 고분에서 발견되는데, 가야의 기술과 정치 문화의 이동을 시사한다. 가야 세력이 일본의 초기 고대국가가 형성되는데 영향을 미쳤음을 뒷받침한다.
고령에는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이어진 능선에 동그란 무덤들이 무려 700여 기에 달한다. 중심부와 말단에는 대형 고분들이 배치되고, 주변에는 중·소형분이 분포됐다. 44호분에는 32명이, 45호분에는 12명이 순장됐다. 이 문화가 북방문화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없지만 지배자의 권력이 강력했던 정치체였음을 알수 있다. 또 고분군의 북쪽에는 주산성, 동쪽에는 궁성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지산동 일대가 정치·군사·의례가 결합된 중심 공간임을 뜻한다.
출토된 고령 양식의 토기, 금제 귀걸이, 금동관, 환두대도, 마구 등은 대가야가 주변 소국들에 위신재를 배포하고, 소국들과 복속관계를 형성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장식품, 조개 재료 같은 유물은 일본 열도와 교류가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대가야는 주변에 다라국(합천), 안라국 등의 소국들을 거느린 중심국이었다.
경남 함안 일대에서는 '안라국'으로 불린 '아라가야'가 변한 시기부터 성장했다. 낙동강의 하류와 남강 유역의 농업 생산력, 그리고 철 자원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힘을 축적하였다.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에는 대형 봉토분들 안에서 금동관, 철기, 마구들이 발견되었다. 마산의 진동 일대에 해상 거점을 만들고, 일본열도와 교류하면서 철과 물자를 매개로 한 해상 네트워크에 참여했다. 단순한 강상 소국이 아니라 해양과 강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강해소국임을 보여준다.
비록 『일본서기』에만 기록됐지만, 529년에는 백제·신라·왜 사신을 초청한 소위 '안라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독자적인 외교 질서를 유지했다. 아라가야는 남부 가야권의 핵심세력으로서 대가야와 더불어 남북 이원체제를 이루었다. 그 밖에 합천의 다라국도 강한 소국이었다.
◆가야계의 붕괴와 일본열도 진출
후기 가야의 이러한 다핵 구조는 생태환경에는 장점이지만, 동시에 한계도 있었다. 통일된 국가 체제를 끝내 못 이루고 각개 세력은 분산된 상태였다. 결국은 주변 강국들이 만드는 이해관계 속에서 약화되었다. 특히 신라는 6세기인 지증왕 시대에 들어서 급팽창을 했다. 젊은 용장인 김이사부의 주도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국토 재편 계획을 시도했다. 529년에는 가야와 왜 세력을 공격하고, 532년에는 낙동강 하류의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훗날인 553년에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빼앗았고 설치한 '신주'의 초대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훗날 신라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가야는 554년에 백제의 연합군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백제의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남부 질서의 주도권은 완전히 신라로 넘어갔다. 신라는 555년에 경남 창녕과 함안 등에 관청을 설치해 서부 낙동강 하류의 수로망, 동부 남해의 물류망과 해양능력을 완벽하게 획득했다. 그리고 아라가야는 561년에 신라에 편입된다. 이어 대가야 마저 562년에 화랑인 사다함이 참전한 김이사부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때 남은 가야 세력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또 한번 이동했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천손강림 신화, 즉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하늘에서 내려와 국가를 세운다는 서사는 김수로왕 신화와 구조는 물론이고, 붉은 천에 싸여 내려오는 상황과 등장하는 지명들도 '구시후루'와 '구지봉'처럼 음이 비슷하다. 때문에 가야계 집단이 일본 열도의 한 지역에 도착해 지역 국가를 형성한 과정일 수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시 우에시마(上島) 고분에서 발견된 6세기께 황금장식 마구들을 보면과 복원된 기마호족상은 당시 일본 야마토 조정이 이 지역 호족에게 전해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즈모 지역에 신라인과 더불어 가야인의 왕래가 많았던 상황을 알 수 있다.
가야계 집단이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준 상황을 놓고, '기마민족설', '삼한 분국설' '왜·한 연합왕국설' 등 다양한 이론과 연결되어 논의되어 왔다. 나는 1994년에 배로 90일 동안 한국을 출항해 지중해와 북해를 거쳐 다시 흑해를 왕복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등 해양 폴리스(polis) 또는 해양제국들의 역사를 실감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는 '양안(兩岸) 국가' 또는 식민 모국(母國)과 자국(子國)의 2중 체제라는 메카니즘이 작동함을 깨달았다. 가야 또한 전성기에 대한해협을 두고 원격통치를 하는 양안 국가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정치력이나 군사력, 그리고 국제질서를 고려할 때 주체는 원가야임이 분명하다.
◆해양 연맹체의 필연적인 비극
가야의 역사는 우리 역사 속에서 독특한 흐름으로 정리된다. 해양 활동과 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금관가야 중심의 도시국가 연맹은 급변하는 국제질서와 외부의 충격 속에서 크게 균열됐다. 하지만 대가야를 중심으로 내륙과 해양을 결합한 국가 단계로 변신을 시도해 다핵체제로 변신에 성공했다 . 지산동의 순장과 금동관, 함안 말이산의 대형 봉토분이 보여주듯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 역동적인 힘은 시대에 걸맞은 통합국가로 전환되는데는 실패했다. 점차로 해양 무역망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도시국가 연맹체라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내부 분열과 외부 압박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시대상황을 외면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후 우리 역사에는 해양소국 연맹체가 사라졌다.
지금 이 시대에 가야의 붕괴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