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어느 해안이나 평원에서 희귀한 고대 동전 또는 청동 조각상이 발견되었다는 토픽을 보면 이마에 반짝 미열이 돋는다. 나는 어릴 적부터 천문학자나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영화 인디아나 존스, 디그(The Dig), 동네서점 서가에 꽂힌 솔로몬의 동굴, 보물섬 같은 동화 책등만 봐도 그 꿈이 뿌린 아련함에 홀리곤 한다. 여행지 중에서도 트로이나 시안, 경주 등지 발굴 현장을 지나갈 땐 망원경으로 유물에서 흙을 걷어내는 연구자들의 손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한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20세기 고고학자들 중 '실크로드의 악마' 또는 '인류 문화유산의 수호자'로 양극단적 평가를받는 이들이 있다. 스웨덴인 스벤 헤딘, 헝가리계 영국인 아우렐 스타인, 독일인 폰 르콕, 프랑스인 폴 펠리오, 러시아인 올덴부르크, 미국인 랭던 워너,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20세기 초반부터 1930년 중국이 반출을 금지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실크로드에 묻힌 수많은 유물들을 해체하거나 벗겨 내어 중국 바깥으로 주로 서구(西歐)로 빼내 갔다.
고대 왕국 누란(樓欄)의 유적을 발견한 것으로 자국에서 평민으로선 마지막 귀족 작위까지 받은 스벤 헤딘, 둔황(敦煌) 막고굴 장경동 유물 연구로 '둔황학'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우렐 스타인(그는 고구려 고선지 장군 유적도 발견해 서구에 알렸다), 12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둔황, 키질, 베제클리크에서 수백 상자의 유물을 독일로 반출한 폰 르콕(2차대전 연합국의 공습으로 대부분 파괴되었고 상당량 구(舊) 소련군이 약탈해가 현재 에르미타주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뿐이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으로 우리에겐 그들 중 누구보다 친숙한 폴 펠리오는 뒤늦게 도사 왕원록에게서 장경동 희귀 고서들을 무수히 사들여 자국으로 반출했다.
미국 최초 동양 미술사 연구자이며 하버드대 포그박물관 지원으로 탐사에 나선 랭던 워너는 학자로선 절대 해서는 안될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벽화들을 훼손해 현재까지 지탄받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전쟁 시기 개성의 만월대 훼손은 그가 막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러시아 제국시기 여성 고고학자 포타니나는 비교적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에 애정을 가진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고. 뒤이어 두루마리 300여 점을 반출한 올덴부르크와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문이었다. 뒤이어 세 차례에 걸쳐 막대한 유물을 약탈해 간 것은 일제의 오타니 고즈이였다.
서구 제국들을 흉내 내어 문화재 약탈 경쟁에 나선 오타니는 결국 재정 압박에 시달려 일부 유물을 당시 광산 재벌 구하라에게 매각했다. 당시 조선 광산 채굴권을 얻고자 했던 그는 유물을 조선 총독부에 기증했고 해방 이후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오타니 컬렉션'으로 벽화 60점을 비롯하여 조각, 공예품 등 1천7백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간쑤성 둔황을 지나 투루판으로 가는 길은 뜨겁고 황량했다. 투루판(吐鲁番), 돌궐어로 '풍요로운 땅'이란 뜻인 사막 분지 오아시스다. 연 강수량은 16mm인데 증발량은 무려 3천 mm인 극도로 건조한 땅이다. 지나오면서 본 화염산(火焰山)은 불의 땅 투루판의 산답게 풀 한포기 없이 주름만 자글자글했다. 손오공이 나찰녀의 파초선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를 알듯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온도계가 가리키는 기온은 섭씨 50도, 파초선을 마흔 아홉 번 부치면 화염산의 불을 꺼뜨릴 수 있다고 했던가.
이 뜨겁고 건조한 땅에 반드시 필요했을 관개시설 카레즈와 박물관에도 들렀다. 기원전 700년경 조로아스터교와 함께 신장 위구르 지역에 전파되었다는 카레즈는 우물과 지하수로를 결합한 일종의 인수(引水) 관개시설로 로마제국의 수도교와는 또다른 독특한 모습이었다. 척박한 기후를 이겨낸 인간의 힘과 노력이라니! 아릿한 슬픔과 경외감에 절로 숙연해졌다. 카레즈는 만리장성, 경항 대운하와 함께 중국의 역대 3대 공정으로 꼽힌다고.
그 카레즈에서 흘러나온 물로 키운 농장의 포도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달았다. 포도 농장 주인이 관광객들을 위해 차린 잔치상 앞에서 전통 춤을 추던 투르판 처녀들은 아름다웠고 잘 익은 포도주처럼 정취가 절로 났다. 각각 커다란 건포도 봉지를 한아름씩 안고 우리는 화염산 자락 목두구(木頭溝) 계곡 베제클리크 천불동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아름답게 장식된 집
마른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도로를 한참 달려가자 우리가 둔황 막고굴 다음으로 고대하던 베제클리크 천불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메마른 화염산 절벽 위 벌집처럼 석굴들이 뚫린 그곳 주변에 물이 흐르는 협곡이 있는지 신기하게도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발굴된 석굴 83개 중 일부라도 벽화가 남아있는 곳은 40개뿐이라고 한다. 앞의 그 실크로드 악마들 또는 인류문화 유산의 수호자들 짓이다.
6세기 국씨 고창국 시대부터 7세기 당, 서주시대를 거쳐 13세기 원나라 때까지 석굴이 만들어졌는데 전성기는 10세기 전후 회골(위구르) 칸 시대였다. 베제클리크는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집은 서구문명이 발호한 20세기에 뜯기고 찢겨 처참한 몰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파괴자는 그러나 유물을 약탈해간 제국주의자들뿐만 아니었다. 우상 숭배를 금기시한 무슬림들은 불상의 눈을 도려냈고, 문화혁명 시 홍위병들도 무지막지하게 이곳을 파괴했다고 한다. 우리는 겨우 허락된 예닐곱 개의 석굴을 볼 수 있었는데, 몇 호 석굴이었더라. 마치 샤갈의 초현실적 표현주의 작품을 보는 듯한 벽화를 보곤 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쩌면 러시아제국 유대인이었던 샤갈이 이 벽화를 봤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혼자 했다.
석굴 33호 석가열반도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제자들의 생동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고, 석굴 38호의 나무 아래 흰옷을 입은 마니교 신도, 위구르 왕자와 왕녀들, 종교, 제식, 설화, 신화, 민속, 역사 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룬 벽화들이 많았지만, 불교적 주제가 압도적이었다.
총면적 1천200m, 장방형 구조에 궁륭형 천장, 내벽 전면에 아름답게 장식되었을 온전한 상태의 벽화들을 생각하니 문득 눈물이 설핏 났다. 우리 또한 수많은 침략을 겪은 민족이며 식민 지배를 당하던 시절 온갖 유물과 유적들이 뜯기고 찢겨져 산지사방에 흩어진 이력을 갖고 있지 않은가.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