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자산업의 새로운 물결은 20세기 중반, 미국과 유럽의 실험실에서 태동했다. 1950년대까지 전자산업은 미국의 기술 독주 시대였다. 그 중심에는 전자 기기의 심장이라 불리던 '진공관'(Vacuum Tube)이 존재했다. 진공 속에서 전자의 움직임을 제어하여 전기 신호를 증폭하고 스위칭하는 이 장치는 인류에게 라디오, 레이더, 초기 컴퓨터인 애니악(ENIAC) 시대를 열어주었다.
진공관은 전력을 많이 잡아먹는 데다, 수천 개의 진공관이 내뿜는 열기는 기기를 수시로 고장나게 했다. 피복이 유리로 되어 있어 충격으로 쉽게 파손되었고, 크기가 커서 제품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진공관은 동작 범위의 10%만을 활용할 정도로 에너지 효율이 극히 낮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열로 낭비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더 작고, 더 빠르고, 열이 나지 않는' 소자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 자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유귀훈, 『호암의 마지막 꿈』, 블루메가수스, 2018, 25쪽).
복잡한 기술 장벽을 일거에 무너뜨린 존재는 1947년 연말 미국 벨 연구소가 개발한 '트랜지스터'(Transistor)였다. 존 바딘과 월터 브래튼이 게르마늄과 규소 결정에 불순물을 주입하여 전류의 흐름을 정밀하게 제어하는 소형 트랜지스터를 개발하여 진공관을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도체(導體)란 금·은·구리 등 전기가 잘 통하는 물질을 뜻하고, 부도체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물질의 총칭이다. 부도체에 인공적인 조작을 가해 전기가 흐르도록 만든 것이 반도체(半導體, semiconductor)다. 트랜지스터라는 반도체의 출현은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이었다. 이는 전기의 흐름과 흐르지 않는 이중적 성질을 이용하여 0(꺼짐)과 1(켜짐)이라는 이진 논리(Bit Logic)를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냈으며, 인류는 비로소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를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발명은 진공관 시대를 끝내고 고체 소자 시대(Solid State), 즉 반도체 혁명의 막을 올린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트랜지스터의 출현으로 크기가 더 작고 값싼 라디오, 계산기, 컴퓨터 등이 속속 개발되면서 전자공학 혁명이 일어났다. 트랜지스터 개발 공로로 개발자 두 사람은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직접회로(IC)의 등장
트랜지스터의 등장 이후에도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수만 개의 트랜지스터와 저항기, 콘덴서를 일일이 구리 전선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마이크로화 된 부품을 연결하는 배선의 어려움이 전자 기기의 소형화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수만 개의 부품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량과 크기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이 심각하고 복잡한 난제를 한 방에 해결한 것이 1959년 개발된 '집적회로', 즉 'IC'(Integrated Circuit)였다.
IC는 반도체 칩에 저항기, 충전기, 트랜지스터를 탑재한 다음 회로로 연결한 것이다. 이 기술의 창안자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잭 킬비는 게르마늄 판 위에 수작업으로 소자들을 연결하는 개념을 창안했다. 페어차일드의 로버트 노이스는 실리콘 웨이퍼에 사진을 찍듯 회로를 새겨 소자들을 일체형으로 만드는 '플래너 공정'(Planar Process)을 완성했다. 노이스의 방식은 반도체의 대량 생산과 기계화를 가능케 하여 이후 인텔(Intel) 설립, 실리콘밸리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발명으로 꼽히는 IC 발명자로 등재되었고, 잭 킬비는 그 공로로
200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로버트 노이스는 1990년 사망하여 수상하지는 못했다. 반도체는 칩 하나에 내장된 트랜지스터의 개수에 따라 IC(1천 개 이하), LSI(1천~10만 개), VLSI(10만 개 이상), 1MD램(100만 개 이상)으로 구분한다. 1960년대에는 IC에 100개의 트랜지스터를 박아 넣을 수 있었다. 이후 기술이 급속 진보하여 1974년에는 1만 개, 1989년에는 100만 개, 2007년에는 100억 개의 트랜지스터 내장한 IC 칩(1MD램)이 개발되어 기술적 임계점에 도달했다. 소시지 크기의 진공관이 콩알만 한 트랜지스터로, 나아가 손톱 크기만 한 IC칩에 100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내장한 제품이 등장한 것이다.
반도체가 진화하는 과정은 인류가 미시 세계의 통제권을 확보해 가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반도체 칩 하나에 내장되는 트랜지스터의 수가 폭증하면서 '성능은 2년마다 두 배로 늘고 가격은 절반으로 떨어진다'라는 무어의 법칙이라는 경제적 동력으로 이어졌다. 탄생 초기, 방 한칸을 가득 채웠던 거대 컴퓨터의 연산 능력이 이제는 먼지보다 작은 공간 속에 응축되어 우리 주머니 속 스마트 기기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반도체 개발국이자 원조는 미국이었다. IC 개발 이후 미국은 정부의 파격적 지원과 특허를 통한 기술력을 독점하여 1970년 인텔이 1KD램, 1974년 모스텍이 4KD램, 1976년 인텔이 16KD램을 개발하여 시장을 석권했다. 오래도록 지속될 듯했던 미국의 반도체 패권은 1970년대 후반, 일본의 거센 역습에 부딪쳐 위기를 맞게 된다.
◆1976년 일본, 미국에 '반도체 전쟁' 선포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일본은 1976년 반도체를 국가의 명운이 걸린 국책사업으로 지정했다. 이 해에 일본은 통상산업성(MITI) 주도하에 5대 라이벌 전자 기업인 NEC, 도시바, 후지쓰, 히타치, 미쓰비시를 협력 체제로 묶어 '초고집적 반도체(VLSI) 기술연구조합'을 설립했다. 정부가 300억 엔, 민간이 400억 엔을 출자하여 1M 이상급의 메모리 반도체에 필요한 IC 기술을 개발하여 4년 내에 미국을 추월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일본은 1976년 미국을 상대로 '반도체 전쟁'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이를 위해 민간기업과 통산산업성 산하의 전기기술연구소, 공공 통신 기업인 NTT가 참여하여 민관 합동 연구에 돌입했다. 참여 기업들은 기술 단계에서는 노하우를 공유하고, 상용화 단계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선(先) 협력, 후(後) 경쟁'이라는 독특한 모델을 채택했다.
일본 기업들은 정부의 저리 자금 지원을 받아 불황기에 다음 세대 공장을 짓는 공격적인 '역발상 투자'를 감행했다. 또 미국이 대량 생산의 효율성보다 고부가가치 설계에 치중하며 생산 공정의 혁신을 소홀히 하는 사이, 일본은 공정의 정밀도와 불량률 제로를 향한 품질 관리(QC)에 사활을 걸었다.
문제는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응이었다. 19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석유 위기와 그로
인한 극심한 경기 침체가 닥치자,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가장 먼저 연구개발 예산과 설비 투자를 줄였다. 그 바람에 일본과의 기술 격차를 벌이는 데 실패했다. 한쪽에서는 기를 쓰고 총력전을 벌여 추격하는 와중에, 한쪽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한 결과는 비참했다.
일본은 1978년 16KD램을 개발하여 저가를 앞세워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1978년 10월 일본 반도체 기업 후지쓰가 IBM·TI와 비슷한 시기에 64KD램을 내놓았다. 시장에서는 "미국산보다 고장이 훨씬 적고 가격이 저렴한" 일본산 반도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1980년 2월 NEC가 인텔과 거의 동시에 256KD램을 개발했다. 이때부터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과 미국의 기술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 세계 D램 시장 주도권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일본 반도체 5개 사의 평균 매출액은 TI와 모토로라를 압도했고, 인텔은 파산 위기에 몰려 주력 사업이었던 D램을 포기하고 CPU 기업으로 전환했다. 기술 주도권과 시장 점유율을 한꺼번에 빼앗긴 미국의 언론과 정계는 이 참담한 현실을 두고 "제2의 진주만 공격"이라 칭하며 국가적 위기감을 표출했다(유귀훈, 앞의 책, 26쪽).
반도체 전쟁은 훗날 미·일 반도체 협정과 치열한 통상 마찰의 서막이 되었다. 이는 역설적
으로 일본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한국이라는 새로운 주역이 등장할 수 있도록 지정학적 틈새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반도체는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 국가의 경제적 안보와 문명의 패권을 결정짓는 강력한 전략 무기가 되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펜앤드 마이크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