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가야. 동아지중해의 상해(商海)국가, 해양도시국가 연맹(polis)

입력 2026-03-23 08: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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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주조쇠도끼.
가야 주조쇠도끼.
기리시마 신궁.
기리시마 신궁.
양동리동경.
양동리동경.
왜인전 기록.
왜인전 기록.
붓과 손칼(복원).
붓과 손칼(복원).
야요이 시대 선창구비 배, 시코쿠 福山市 御領 유적.
야요이 시대 선창구비 배, 시코쿠 福山市 御領 유적.

◆잊혀진 역사 가야

'삼국 시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역사용어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마치 이 세 나라만이 고대 한민족 역사의 전부였던 것처럼. 하지만 이 익숙한 틀 속에는 역동적이고, 의미가 깊고, 독특한 존재양식을 지닌 역사가 사라진 거대한 공백이 있다.

500년 이상 존재했지만 내용은 희미하고, 그늘처럼 취급되어 온 나라. 가야는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나라였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일통삼한'(一統三韓), '삼한일가'(三韓一家)를 성취한 통일신라인들의 자부심과 그것을 계승한 고려 귀족들의 시대정신 때문일까? 근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인들은 '임나일본부설'처럼 자국의 역사를 탈색시키려고 이용하는 연구방식에 치중했다. 우리 학계 또한 아직도 가야의 역사를 충분한 정도로 규명하진 못했다. 사료나 유적, 유물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연구하는 방식 자체가 가야의 특수성을 이해하는데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모든 정치력이 한데 모인 중앙집권국가가 성공한 체제일까? 아니면 지역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권력을 분산한 체제가 더 나은 것일까?. 인류가 청동기 시대 이후 여러 지역에서 끊임없이 던져언 현재 진행형인 물음이다. 세계도, 한국 사회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반복하는 중이다.

가야는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체험을 역사 속에서 실천했던 나라였다. 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했으며, 두 시대로 구분하면 전기에는 다른 소국들끼리, 이어 신라·백제와 경쟁하면서 성장했다. 또한 가장 먼저 일본 열도로 건너가 개척하면서 해양 무역으로 번성했다.

특히 금관가야(구야한국)는 삼한 소국들 가운데 가장 먼저 국제적으로 알려진 나라였다. 하지만 가야 소국들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고, 약해지다가 제일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가야의 성공과 실패는 단순한 정치사의 문제가 아니라, 해양과 일본열도라는 공간과 깊이 연결된 역사적인 현상이었다.

◆하늘의 자손과 땅과 해양의 세력이 세운 나라

가야는 가리키는 이름부터가 역사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원래는 '구야', '가라'(加羅)였지만, 후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가야'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일본에는 지금도 '가야', '가라', '게야'와 같은 지명이 남아 있으며, 이는 '韓'(한)으로 표기된다. 19세기 일본의 근대화론자들이 '정한론'을 주장할 때 '임나'와 더불어 이 용어를 이용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 나라의 이름이 여러지역에서 유사한 용어로 퍼져 있다는 사실은 곧, 이 나라가 하나의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이동하고 확산된 역사적 실체였음을 의미한다.

건국설화도 매우 복합적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두 가지 형태의 건국신화가 전한다. 하나는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알이 담긴 금합이 내려왔고, 그 가운데 하나가 수로왕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는 전형적인 천손강림 신화이다. 6개의 토착 세력 또는 소국이 모여 금관 가라를 중심으로 더 큰 소국 연맹체가 됐다는 역사를 반영한다.

8세기 초에 편찬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첫 부분에도 천손인 니니기노미코도가 삼종신기를 갖고 다카마노하라(하늘)를 떠나 구시후루(구지봉과 음이 비슷함)로 하강한다. 그리고 후손인 짐무(神武)가 초대 천황이 된다. 가야계가 왜국 건국의 주도권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지끔까지도 천손을 모시는 기리시마(霧島) 신궁 근처에는 '가라구니다케'(韓國岳)가 있다.

또 하나는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 설화이다. 48년 7월 27일,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망산도(지금의 창원 인근)에 도착했다. 배에는 돌탑과 20여 명의 종자, 그리고 16세의 여인과 그의 오빠가 타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이며 김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설화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신화의 정의인 '역사성과 설화성이 공존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해양 이동과 교류에 대한 역사적 사실 또는 집단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또 아유타국의 위치를 놓고 인도 갠지스강 유역의 아요디아 왕국(김병모 교수), 태국 북부의 아유타야시 등의 설들이 나왔다.

과연 2천년 전에 이러한 장거리 항해가 가능했을까? 물론 가능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남서 계절풍을 타고,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하면 한반도까지 도달할 수 있다. 나는 2012년 이 가능성을 직접 검증하기 위해 루손섬에서 뗏목 탐험을 시도한 적이 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먼거리 항해 가능성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인류는 최소 7만년 전부터 장거리 원양항해를 해서 바다를 단절의 공간이 아니라, 연결의 공간으로 이용했다. 이미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진나라는 동남아시아 지역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위만조선과 한나라가 해륙 양면전을 벌인 이후에 동아지중해권의 해양교류는 더욱 활성화됐다. 그렇다면 허황옥 집단은 중국의 남부 지역이나 동남아시아, 심지어는 인도에서도 올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 신화가 중요한 것은 그녀의 출신지 등의 사실이 아니라, 가야가 외부 세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 해양 사회였다는 메세지이다.

◆가야 소국 연맹체의 탄생

기원전 3세기 무렵, 한강 이남에는 '삼한'이라는 78개로 구성된 소국 연맹체가 존재했다. 이 소국들은 대부분 큰 강이나 바닷가와 같은 교통의 요충지에서 성장한 '강해(江海)소국'들이다.

'삼국지' 한전에 따르면 가야의 전신인 변한은 미리미동국, 고자미동국, 미오야마국, 구야국, 독로국 등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중기 쯤에는 금관가야, 훗날 대가야로 변신한 반파국,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 있는 안라국(아라가야) 등 22개국 정도로 추정된다.

이 소국들이 성장한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의 생태환경은 단순한 농업 공간이 아니었다. 한반도 동쪽 내륙을 중부부터 관통하며 남해로 흘러드는 길고 거대한 강상 수로망이 있었다. 특히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 일대는 동해와 남해의 항로가 만나고,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일본 큐슈로 이어지는 최단 경로에 위치했다. 이 때문에 이 곳은 단순한 도시 소국이 아니라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 상업망의 핵심 항구였다.

가야 지역에는 주로 해양을 활용해서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한반도 서북부에서 철기와 청동기 문화가 들어왔고, 바다를 건너 중국의 거울과 화폐, 그리고 일본 야요이 문화의 토기까지 들어왔다. 창원의 다호리, 사천 늑도, 김해 양동리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 지역이 이전부터도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한다.

특히 철은 가야의 핵심 자원이었다. '삼국지'에는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며, 한과 예, 왜가 와서 이를 취한다"는 기록이 있다. 무기 등을 제작하는 철정은 화폐였고, 무역의 핵심 매개체였다. 반면에 야요이 시대의 초기부터 농기구와 볍씨 그릇과 무기들까지 갖고 건너간 일본열도로 가야인들은 물건들을 수출했다. 실제로 연나라의 명도전과 오수전 같은 화폐가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 열도까지 발견되는 것은, 유기적인 경제권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무역도시 국가인 금관가야

위만조선이 건국한 이후 무역권은 요동반도에서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열도까지 연결된 동아지중해 전체로 확산되고, 그 상황 속에서 삼각꼭지점인 남해동부 해안에는 발전된 '무역도시'가 필요했다. 따라서 강력한 선단과 안전한 항로, 그리고 좋은 항구와 뛰어난 선원들을 확보한 세력이 주도권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남해안 일대에는 기록들과 많은 유적들에서 증명되듯이 해양 도시소국들이 있었으나 구야한국, 즉 금관가야가 급속히 성장했다. '후한서' 왜인전에는 '~무제가 조선을 멸한 후부터 (왜에) 역관을 보내어 한나라와 통하고자 한 것이 30여 국이나 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왜인전에는 대방에서 일본열도까지 가는 교통로를 구야한국(김해)를 출항해서 대마국, 일기국, 말로국, 이도국, 노국, 불미국, 투마국, 야마대국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금관가야는 단순한 도시 소국을 넘어 동아지중해 해양 네트워크의 중핵이었다.

김해 양동리에서 2세기 말에 살았던 수장급 무덤에서 두개의 중국제와 일곱 개의 모방품 청동거울을 비롯해 넓적한 청동창, 굽은옥, 목걸이 등 야요이 문화의 상품이 출토됐다. 근처인 대성동 유적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금관가야가 철 등을 수출하는 국제 무역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초창기에는 바다를 건너온 또 다른 소국인 사로국(신라)의 석탈해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수로왕은 강력한 해양력을 토대로 주사(舟師) 500척을 동원해 해전을 벌인 끝에 승리했다.

그러나 가야는 하항(河港) 도시와 해항(海港) 도시들이 결합한 연맹체였다. 이 구조는 유연하고 개방적이었지만, 동시에 취약했다. 소국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경쟁했고, 물길과 무역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3세기 초에 같은 가야계의 8개의 소국(포상팔국)들이 연합해서 공격했을 때는 신라의 도움으로 물리쳤을 정도였다. 마치 에게해에서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의 해양 도시국가(polis)들이 경쟁하던 모습과도 닮았다.

◆가야의 존재 의미는?

결국 가야의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고대 사회에서 중앙집권적 국가가 더 나은가, 아니면 분권적 도시 연맹이 더 나은가? 가야는 생태환경에 충실하여 후자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번영을 가져왔지만 대신 통합의 실패를 낳았다. 시대상황이 점차 변하면서 동아지중해의 무역 메카니즘이 달라졌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의 정치환경도 변하였다. 가야는 역사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시대에 적응을을 시도했다. 소위 후기 가야의 시작이다.

지금까지는 가야를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미완성 국가"로 평가하고, 삼국시대라고 불러 역사에서 소외시켰다. 전기 가야는 농업 중심의 육지국가가 아니라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공간에서 탄생한 도시소국 연맹의 전형이었다. 그러니 가야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나라가 아니라, 후대인의 해석 방식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가야를 이렇게 정의한다. 동아지중해의 상해(商海)국가, 해양도시국가 연맹(polis) 등의 용어로.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