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이연정] 기증, 이제 하나의 문화로

입력 2026-03-15 12:39:11 수정 2026-03-15 14: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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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정 문화부 기자

이연정 문화부 기자
이연정 문화부 기자

2021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 소장품 2만3천여 점을 사회에 내놓았다. 미술품 기증 사례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다수 포함한, 가치가 상당한 미술품들이었다.

'세기의 기증'이라 불린 '이건희 컬렉션'은 수많은 국민을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불러들였다. 대구에서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역대급 흥행을 기록했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두 차례의 전시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걸렸던 국립대구박물관 전시 관람객 수를 합하면 37만여 명에 이른다.

이건희 컬렉션은 이제 세계를 홀리고 있다. 최근 미국 워싱턴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막을 내린 이건희 컬렉션 해외순회전은 이곳의 지난 5년간 특별전 최다 관람객 수인 8만 명을 기록하며 성황을 이뤘다. 이건희 컬렉션 해외순회전은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시카고박물관과 영국박물관 등으로 이어지며 한국 전통문화의 힘을 알려나갈 전망이다.

개인이 수집한 미술품이 얌전하게 수장고에만 있었다면 이런 문화적 파급력은 없었을 터. 과거에는 개인이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을 사회에 선뜻 내놓는 경우가 흔치 않았고 미술품 기증 자체에 대한 인식이 낮았으나, 이건희 컬렉션은 개인 소장품이 공공의 자산으로 환원돼 가치가 재창출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미술품 기증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대구의 문화기관들은 최근 기증받은 미술품들을 적극 꺼내 보이며 기증의 긍정적 효과를 끌어내고 있다. 기관들은 이제 수장고에 머무는 소장품이 아니라, 학술 연구 등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재활용되는 공공 컬렉션 활성화에 본격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대표적인 예가 국립대구박물관이 박물관 뒤편 언덕에 조성한 '모두의 정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미술품 중 석조물 257점을 산책로를 따라 전시했다. 이전까지 대중의 관심이 거의 없었던 석조물들은 '이건희 컬렉션' 이름표를 달고 가치 있는 전시품으로 격상됐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소장품 보고전'의 출품작 중 다수는 지난해 기증받은 작품이며, 대구문화예술회관은 지난해 수증작 125점 중 70여 점을 선보이는 기증작품 특별전 '이음'을 선보이고 있다. 대구근대역사관은 2023년부터 연 서너 차례 '기증유물 작은전시'를 통해 기증자를 예우하고 시민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으로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유산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 역시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언제든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 이후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는 기증 문화가 반가운 건, 소장품 수의 단순한 확장을 넘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연구 자료로서의 토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지역 근대 미술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이제 겨우 시립박물관 운영이 체계화되기 시작한 대구에 기증 문화가 확산돼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 대구문화예술회관에 100점의 작품·자료를 기증한 한 개인은 '작품이 개인 소장에 머무르기보다, 시민과 공유되는 공공의 장에서 더 넓게 향유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좋은 작품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증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작품 기증과 연구, 그리고 기증작 전시가 또 다른 기증의 길을 터주는 이 선순환의 기증 문화가 앞으로 더욱 활성화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