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자아가 물러나는 순간

입력 2026-03-08 12:58:56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며칠 전 수성아트피아 무대에 올랐다. 봄 음악제 '로맨틱 레거시' 공연이었다. 존경하는 음악 동료들과 이날의 연주를 위해 오랜 시간 함께 준비해왔다. 무대에 오르기 전 나는 늘 잠깐 눈을 감는다. 연주 중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해달라고, 음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음악을 통해 청중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내 마음속에서 연주는 먼저 신께 드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청중에게 닿는다.

연주가 잘 되는 날에는 묘한 경험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악보를 따라가며 음을 확인하고 긴장 속에서 연주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계산이 흐려진다. 활의 움직임과 호흡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음악이 스스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때의 느낌은 마치 연주하는 나의 자아가 조금씩 물러나고 음악이라는 더 큰 흐름 속에 잠시 머무르는 것과도 같다. 연주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현실의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

이런 경험은 음악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는 레빈이 농부들과 함께 풀을 베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자 낫의 움직임이 리듬을 만들고 몸도 그 리듬에 맞춰진다. 반복되는 동작 속에서 생각이 사라지고 그는 이상한 평온을 느낀다. 톨스토이는 그 순간을 인간이 가장 살아 있는 상태처럼 묘사한다.

생각해 보면 음악 연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활의 리듬이 이어지고 손의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연주자는 음악 속으로 들어간다. 기술이나 계산은 뒤로 물러나고 오직 흐름만 남는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상태를 '몰입(Flow)'이라고 설명했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몰입이 없는 행복은 단순히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어서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사라질 수 있지만, 몰입에서 오는 행복은 인간이 얼마나 성숙한지를 보여준다고 보았다. 그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해 어떤 일에 깊이 빠져 있을 때 가장 충만한 삶의 감각을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순간도 바로 이런 몰입의 상태일지 모른다.

몰입이 깊어질수록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연주자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내가 연주하고 있다'는 의식이 흐려질 때 음악은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그 순간 음악은 연주자 안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으로 퍼져 나가며 청중과 만난다.

톨스토이는 예술을 '감정의 전염'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감정이 전해지는 순간은 아마도 연주자가 자기 자신을 잠시 내려놓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연주가 끝난 무대 위에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 나는 좋은 연주를 했을까. 아니면 잠시 음악 속에 머물다 나온 것일까.

어쩌면 좋은 연주란, 연주자가 사라지는 순간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