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는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必讀書)였다. 소설 속 홀어머니는 배우지 못했고 가난했다. 그런 삶을 숙명으로 여겼던 어머니가 혁명에 뛰어든 아들을 지켜보면서 '혁명성'을 각성한다는 내용이다.
고리키는 혁명의 주체였다. 그랬던 그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벌어진 대숙청과 인민재판에 실망했다. 고리키는 "혁명에 동참한 대의가 이런 게 아니었다"고 했다. 피아(彼我)를 나눠 상대를 짓밟는 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올바른 길이냐고 물었다. 레닌과 스탈린은 독재(獨裁)를 비판하는 고리키를 회유하고 협박했다. 고리키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저서 '시의적절하지 않은 생각들'에서 "권력은 인간의 존엄과 사상의 자유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혁명 정부가 폭력과 검열(檢閱)을 자행하면서 도덕적 정당성을 갉아먹고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혁명의 이름으로 언론을 억압하고 반대 의견을 탄압하는 순간, 혁명은 지배의 도구로 전락한다는 통찰(洞察)이다.
고리키를 생각하면, 조지 오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사람'을 우선하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소련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서구 사회주의 진영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발단은 그가 쓴 소설 '동물농장'이었다. 이 소설은 스탈린 체제를 풍자(諷刺)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나아가 '독재 일반'에 대한 우의적(寓意的) 풍자이기도 하다. 농장주 존즈 씨(인간)를 쫓아낸 뒤, 돼지들은 '동물의 천국'을 만들겠다며 권력을 잡았다. 돼지들은 권력에 취해 괴물이 되어 갔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곱 계명(誡命)을 멋대로 고쳤다.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는 '어떤 동물도 시트를 갈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고 바꾸는 식이다. 이 소설은 혁명이 어떻게 변절되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어떻게 타락하는가를 보여준다. 부패한 돼지와 독재자 나폴레옹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다.
오웰은 권력만을 목표로 한 혁명은 주인만 바꿀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 세상이 어찌 달라지겠는가.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는 김수영의 시('그 방을 생각하며')와 같은 의미다. 혁명의 깃발이 특권(特權)의 완장이 된 사례는 숱하다. 4·19, 5·18 이후 그랬고, 6월 민주항쟁과 촛불혁명 때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정치는 여전히 내전(內戰) 상태다. 탄핵으로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치는 그대로다. 정치적 반대는 '다름'이 아니라 '적대'로 규정된다. 정책 비판은 진영 공격으로 치환(置換)된다. 국민은 여야가 국익과 민생을 위해 손 잡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 일은 '토끼 머리에 뿔 날 때'나 가능할 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독주(獨走)는 암울하다. 모든 게 개혁 대상이다. 반대하면 '내란 세력'으로 몰린다. 검찰·사법 개혁에 이어 언론 개혁을 밀어붙인다. 언론사의 의견과 주장을 담는 사설·칼럼에도 정정·반론 청구를 보장하겠단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겠단 말인가. 비판을 제거하면 침묵이 온다. 침묵 뒤엔 권력의 전횡(專橫)이 따른다. 오웰의 명언(名言) 하나 덧붙인다. '소 귀에 경 읽기'라고 핀잔을 들어도 할 수 없다. "자유가 의미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다." 문장은 단순하고, 의미는 무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