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대한제국은 인구 1천600만 명, 만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였다. 그런데 총 한 방 쏘지 않고 허망하게 주권을 일본에 넘겼다. 고종이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이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우자"라면서 투쟁의 선두에 섰다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까? 반일 감정이 일상화된 한국에서 망국의 시기에 고종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는 흥미로운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고종은 나라가 망할 무렵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갔을까를 추적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일부일처제를 도입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이 일부다처제를 미개하고 야만적인 풍습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등장시킨 슬로건이 "강한 나라는 깨끗한 가정을 가진다"라는 것이었다. 근대화를 추구하던 메이지 정부는 천황 일가부터 일부일처제를 솔선수범하여 서구와 대등한 도덕 수준을 갖춘 문명국으로 나가고자 했다. 말하자면 천황을 통해 '모범적 가장(家長)'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메이지 천황의 부인 쇼켄(昭憲) 황후가 자녀 생산을 못 해 천황가의 대가 끊길 판이 되었다. 결국 메이지 천황만은 예외를 인정하여 측실(후궁) 제도를 통해 아들 요시히토를 얻었다. 그가 다이쇼 천황(재임 1912~1926)이다. 다이쇼 천황은 데이메이(貞明) 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넷을 두어 후계 구도가 안정되면서 이때부터 천황가는 일부일처제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메이지 천황과 동갑(1852년생)이고, 비슷한 시기에 왕위에 오른 고종은 조선의 전통이었던 일부다처제를 승하할 때까지 온몸으로 실천했다. 왕실의 번창이 국가의 번창이라는 전통적 유교 가치관을 충실히 이행하려 했던 의지의 결과물로 보인다.
12세에 즉위한 고종은 15세 때 민치록의 딸과 혼인한다. 그가 '민비'라 불린 민 왕후다. 하지만 고종은 왕비보다 연상의 궁녀에 더 관심을 보였다. 1868년 4월 고종은 궁녀 이 씨에게 '승은(承恩)'을 입혀 아들 완화군을 얻었다. 당시 고종은 18세, 궁녀 이 씨는 고종보다 9년 연상인 27세였다. 1874년 정식 왕비인 민 왕후가 정통 적자 이척을 낳으면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다. 첫 아들 완화군은 뒷방으로 밀려났고, 완화군은 13세 때 홍역으로 죽었다.
두 번째 후궁 장 씨는 고종보다 14세 연상의 여인이었다. 그녀도 고종의 '승은'을 입어 임신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왕비 민 씨의 분노를 사게 될까 두려워 궁 밖으로 나가 1877년 아들 이강을 출산했다. 궁 밖에서 기구하게 자란 이강은 태어난 지 14년 후인 1891년에야 고종으로부터 '의화군'이란 군호를 받고 왕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입궁 전까지 시장바닥의 건달, 무뢰배들과 어울렸고, 왕자가 된 후에도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등 궁궐 법도를 무시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고뭉치 시한폭탄이었다.
◆'뚱뚱하고 천박한' 엄 상궁 총애한 고종
고종의 여성 편력 중에서 주목의 대상은 엄 상궁이다. 다섯 살에 입궁하여 궁녀가 된 엄 상궁에게 임오군란은 축복이었다. 민비는 난병을 피해 궁에서 탈출하여 장호원으로 피신했고, 실종된 민비를 대신하여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사람이 엄 상궁이다.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그는 왕과 왕비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위 상궁에 임명되었다. 이 와중에 1885년 엄 상궁이 고종의 '승은'을 입은 사실이 밝혀졌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민 왕후의 분노가 폭발했고, 엄 상궁은 그 즉시 궁에서 쫓겨났다.
내쫓긴 엄 상궁은 먹고 살기 위해 신분이 천한 남성과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 왕후가 일본인에게 참혹하게 시해 당했다. 사건 발생 닷새 후, 궁에서 왕비의 피비린내가 가시기도 전에 고종은 엄 상궁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 모습을 본 황현은 "임금이 쓸개 빠진 짓을 했다고 서울 사람들이 모두 한탄했다"는 말을 남겼다.
엄 상궁의 입궐 다음 날, 고종은 "왕비 자리는 하루라도 비어 있어서는 안 된다"라며 왕비 간택령을 내렸다. 이것은 고종의 뜻이 아니라 을미사변의 후유증을 축소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이 친일 내각에 압력을 넣어 벌인 일이었다. 고종은 "이는 나의 뜻이 아니므로, 누가 간택되든 왕비로 인정하지 않겠다"라며 저항했다. 친일 내각의 강압 조치로 광산 김씨 집안의 17세 된 처녀 정화당 김 씨가 새 왕비로 결정됐다.
고종은 새 왕비를 소가 닭 보듯 했고, 곧이어 발생한 춘생문 사건으로 정화당 김씨는 정식 간택되지 못하고 출궁 당한다. 그녀의 입궁이 허락된 것은 1917년 5월이다. 입궁 후에도 김 씨는 궁궐 후미진 방에서 독수공방했다. 고종 사망 후 유해를 상면했을 뿐, 그녀는 황후 예우는커녕 후궁 예우도 받지 못하고 수절하며 살다 죽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고종은 신분이 미천한 데다 추문이 자자했던 엄 상궁을 끔찍하게 총애했다. 엄 상궁은 민 왕후 찜쪄먹을 정도로 미신을 섬겼고, 고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매관매직에 앞장섰다. 독일 영사 크뤼거는 엄 상궁에 대해 "뚱뚱하고 천박하며, 얼굴에 마마 자국 가득한 추한 여인"이라고 기록했다. 다른 외교관들도 "지독하게 탐욕스럽고, 고종을 심리적으로 지배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만드는 인물", 혹은 "권모술수에 능한 기회주의자"로 평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엄 상궁 임신시켜 영친왕 출생
1896년 2월 고종은 궁녀 가마에 숨어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한다. 아관파천 당시 궁녀들을 단속하여 국왕을 무사히 탈출시킨 일등 공신은 엄 상궁이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생활하는 동안 천러파 이범진과 결탁한 엄 상궁은 고종 주위를 내시·궁녀로 철통같이 에워싸고 권력 장악에 성공했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에서 생활했다. 그 기간 내내 엄 상궁은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했고, 고종은 그녀에게 '승은'을 입히는 것으로 화답했다.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 8개월 만인 1897년 10월, 엄 상궁은 영친왕 이은을 낳았다. 출생일을 역산해 보면 고종은 남의 나라 공사관에 숨어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엄 상궁을 임신시켰음을 유추할 수 있다.
뜻있는 선비들은 국모 원수도 갚지 못한 상황에서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후궁과 아이 만든 사실을 참혹한 수치로 여겼다. 게다가 엄 상궁이 영친왕 이은을 낳았을 때 나이가 43세였다. 지금이야 의학의 발달로 노산(老産)이 흔하게 되었지만, 19세기 말에는 할머니 소릴 들을 나이에 첫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40 넘은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라는 의혹과 온갖 추문이 횡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종은 자기 자식을 출산한 엄 상궁을 정4품 귀인에 봉했고, 1900년 정1품 순빈, 1년 후 순비로 승격하여 벼락출세했다.
엄비는 막대한 비자금을 살포하여 자기를 황후로 책봉키 위한 공작을 개시했다. 하지만 주자성리학 탈레반이나 다름없는 최익현의 태클에 걸렸다. 최익현은 "과거가 불분명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을 어찌 국모로 모시겠느냐"라며 고종에게 목숨 걸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고종의 눈 밖에 난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 가는 신세가 되었다.
비자금의 효력 덕분인지 의정부 의정 윤용선은 엄비가 아관파천의 일등 공신이니 그 공로를 감안하여 황귀비(皇貴妃)로 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황귀비란 명·청 황제의 후궁 작위, 황후(皇后)에 준하는 으뜸 후궁 칭호다. 고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1903년 12월 순비 엄 씨를 황귀비로 봉해 국모나 다름없는 지위를 부여했다. 총애하는 엄비를 위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위를 급조한 것이다.
◆망국 후 궁녀에게서 2남 1녀 얻은 고종
엄비가 황귀비로 봉해지면서 그녀를 보필하는 경선궁이 설치되었고, 엄청난 규모의 내탕금(황실 개인 자산)과 토지가 하사되었다. 경선궁 관리를 맡은 엄비의 남동생 엄준원은 전국의 비옥한 토지를 헐값에, 혹은 강제 매입하거나 압류 방식으로 경선궁 재산으로 편입시켰다. 그는 황실의 공적 자신을 엄비 일가의 개인 금고처럼 운영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장안에는 "벼슬하려면 엄비 치맛자락을 잡거나, 엄준원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할 정도였다. 관직을 얻기 위해 엄준원에게 막대한 뇌물 바치면, 엄준원은 그 명단을 여동생 엄비에게 넘겼다. 경선궁을 중심으로 매관매직 시스템이 왕성하게 작동한 것이다.
이렇게 모은 자금은 엄씨 일가의 호화 생활과 재산 증식에 사용됐다. 엄준원은 숙명·진명학교를 세웠고, 엄비의 7촌 조카 엄주익은 양정의숙을 세웠다. 학교 설립 및 운영자금은 고종이 하사한 황실 자산과 경선궁 수익금이었다. 황실 자산으로 개인 명의의 사립학교를 설립한 셈이다.
1910년 한일병합 기운이 감돌자 엄준원·엄주익은 황실 소유의 토지와 자산을 학교 법인 명의로 돌려 일제의 몰수를 피했다. 두 사람은 떳떳치 못한 돈으로 학교를 세워 교육자로 행세했고, 일제 시절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유력자로 떵떵거리며 살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고야 말았다.
황귀비 엄 씨는 병합 후인 1911년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57세 나이로 사망했다. 병합 후 덕수궁 이태왕으로 물러난 고종은 여러 궁녀들에게 '승은'을 입히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종이 61세 되던 1912년, 덕수궁 소주방 나인(주방 식모) 출신 양 씨가 덕혜옹주를 출산했다. 63세 때는 경복궁 세수간 나인(무수리) 출신 이 씨가 '승은'을 입어 아들 이육을 낳았고, 64세 되던 1915년에는 궁녀 정 씨가 '승은'을 입어 아들 이우를 낳았다. 두 아들은 유아 시절 죽고, 덕혜만 생존했다. 덕혜옹주는 일본 유학 시절 조현병이 발병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개명 군주' 고종의 망국 후 사생활의 진면목이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