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사람의 얼굴은 도시가 만든다

입력 2026-01-25 09: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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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김혜령 바이올리니스트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묘하게 힘이 빠져 있을 때다. 쫓기지 않는 얼굴, 급하지 않은 눈. 며칠 싱가포르에 머무는 동안 내가 자주 붙잡히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얼굴들이었다.

특별히 예쁘거나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 단정해 보였다. 표정이 안정돼 있었고, 눈이 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조금 더 좋아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에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에는 비슷한 결이 남아 있었다. 쫓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얼굴들이 가능했을까. 감각을 다루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나는 설명보다 먼저 분위기에 반응하는 편이다. 말로 정리되기 전의 공기, 아직 감정이 되지 않은 상태 같은 것들. 싱가포르에서 마주한 얼굴들은 그런 감각에 또렷하게 걸려왔다. 이건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가 만들어낸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도시에서는 길을 걸으며 계속 주변을 살필 필요가 적었다. 다음 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예측 가능함이 하루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은 불확실성이 줄어들 때, 빠르게 표정이 풀어진다.

이곳에서 느낀 안정감은 부유함의 문제로만 설명되지는 않았다. 1인당 GDP보다 더 크게 다가온 것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안을 사회가 어느 정도 흡수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일상 깊숙이 깔려 있었다.

저녁이 되자 그 인상은 더 분명해졌다. 퇴근 후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가볍게 한잔하며 웃는 얼굴들. 그 표정에는 하루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내일을 대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제대로 끝내는 저녁처럼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얼굴들은 개인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그 하루를 가능하게 한 조건이 만들어낸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의 표정을 개인의 성격으로만 설명하는지.

우리는 종종 얼굴을 그 사람의 태도나 성향으로 해석한다. 밝으면 긍정적이라 말하고, 굳어 있으면 예민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그 얼굴이 어떤 하루를 통과해 왔는지, 어떤 조건 속에서 버텼는지는 쉽게 묻지 않는다. 어쩌면 표정은 선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도시가 남긴 흔적일지도 모른다.

싱가포르에서 내가 본 것은 잘 사는 나라의 화려함이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까지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환경의 힘이었다. 세련됨은 옷이나 외모가 아니라, 쫓기지 않는 얼굴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그곳에서 다시 확인했다.

어떤 도시는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어떤 도시는 사람을 덜 망가지게 만든다. 싱가포르에서 마주한 얼굴들은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도시가 사람의 표정을 여기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