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상서롭고 고귀한 금빛 산수화가 검은 비단 위에 흰 종이에 스민 수묵 대신 펼쳐졌다. 17세기에 본국제일수(本國第一手), '나라에서 첫째가는 솜씨'라는 칭송을 받은 허주(虛舟) 이징의 '이금산수'다. 이징은 성종의 후손으로 아버지 학림정 이경윤, 작은아버지 죽림수 이영윤 등이 그림으로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종친불사(宗親不仕)의 원칙에 따라 왕손은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에 재능이 있던 이경윤, 이영윤은 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이징은 서자여서 화원이 됐던 조선 중기의 주요 화가다.
금을 곱게 가루 낸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서 그리는 이금화는 재료도 비싸고 기법도 쉽지 않아 화원화가들이 주로 왕실의 감상을 위해 그렸던 귀한 그림이다. 이금화와 수묵화는 비단과 종이로, 금과 먹으로 재료와 기법은 다르지만 둘 다 하나의 색만으로 이루어진 모노크롬 회화라는 점은 같다. 색채를 배제한 단색화라는 점에서 조선의 최상류층과 상류층의 미술에 대한 선호가 비슷했음을 알려준다. 이금과 수묵의 단색(單色)이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의 한 사조인 '단색화(Dansaekhwa)'와 연관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회화가 이미지를 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시대의 그림에서 색을 억제한 이금화와 수묵화는 사실 부자연스러운 일이고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10~11세기부터 수묵화가 감상화의 주류로 자리 잡으며 채색보다 수묵을 우위에 뒀다. 미술의 세계에서 단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관조와 격조일 것 같다고 자답해본다. 사시사철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는 자연이든, 시시각각 바뀌는 인간사든 이 세상의 시공(時空)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어떤 원형(元型)의 세계를 지향한 것 아닐까?
이금은 수묵과 달라서 물의 도움을 받는 농담의 효과나 필법과 묵법의 표현성으로 사물을 드러내기 어렵다. 필선의 선묘에 의지해 제각각의 사물을 그려내야 하는 고도로 훈련된 화기(畵技)를 필요로 한다. 조선 후기 미술평론가 청죽 남태응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이징의 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허주(이징)는 마치 큰 목수(大匠)가 집을 짓고 건물을 세우는 것처럼 구조가 법도의 틀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고, 컴퍼스와 자(規矩)로 사각과 동그라미를 만들고 수평과 수직을 맞추는 것과 같다. 대단히 제도에 맞고 대단히 능란해 작업을 마치고 나면 규모가 모두 정돈되어 하나도 원칙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공력으로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남태응은 이징의 '이금산수'와 같은 실력을 두고 누구든 배운다면 가능한 경지라고 평가했다. 조선 지식층의 미술에 대한 안목은 높고도 높았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