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신중언] '아무도 없는 숲'에서의 죽음…왜 고립자는 보이지 않는가

입력 2025-12-28 14:43:07 수정 2025-12-28 15: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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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언 사회부 기자

신중언 사회부 기자
신중언 사회부 기자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나무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면, 그 소리는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도 이와 닮은 죽음이 있다. 주변과 단절된 채 살아가다 홀로 생을 마감한 죽음, '고립사'다.

이들의 죽음은 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까. 고립된 죽음의 이면에는 고립된 삶이 있었다. 좁은 방과 널브러진 약통들, 수북이 쌓인 공과금 고지서. 고립사가 발생한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풍경이다. 대부분 오래전부터 공동체와의 연결이 끊겨 있었다.

대구에서 집계된 고독사 위험군은 1만682명이다. 물론 이 숫자는 현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조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최소치'를 보고 '대구에 고립된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면 반쪽짜리 답이다.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은 어디에서,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대구 고립자들의 주소지를 지도 위에 기록했다. 영구임대아파트, 원룸·고시원촌, 노후 주택가, 쪽방촌 등 가난이 응축된 동네가 드러났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숲'이었다. 이곳으로 들어가 고립자들이 내는 미약한 조난 신호를 들어봤다.

본지가 연재한 '대구 고립 보고서'는 고립자 개개인의 사연을 퍼즐 조각처럼 모아 고립의 실체를 그려내고자 한 시도다. 교수·사회복지사·연구자 등 여러 전문가를 인터뷰하고 관련 서적과 논문을 검토했다. 이를 바탕으로 약 1년간 고립자 57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담을 진행했다. 주거 유형별로 고립의 형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살폈다. 이들이 소리 없이 쓰러지는 이유를 밝혀내고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보도 이후 달린 댓글들에는 이런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죽을 만하니까 죽은 거다." "젊을 때 대가를 치른 것일 뿐이다" 등 고립을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보는 인식이 드러났다.

고립을 개인의 선택으로만 설명하면 질문은 거기서 멈춘다. 그러나 고립의 경로를 추적하면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수 없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현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고립자들은 ▷가족이 해체돼 정서적으로 기댈 곳이 없었고 ▷궁핍한 처지로 사회적 활동이 어려웠으며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 건강 악화와 물리적 단절을 경험했다.

이 과정은 순차적이면서도 상호 강화적으로 고립을 심화시켰다. 정작 복지망은 이들에게 사회로 다시 나설 수 있는 계기나 재진입 경로를 제공하지 못했다.

고립자들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다. 정부나 제도, 정치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스스로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 가정을 지키지 못했고,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고립은 구조적인 결과다. 우리 사회는 이들이 고립된 후에 삶을 재정비할 최소한의 발판조차 제공하지 못했다. 그 공백 속에서 개인은 고립을 스스로의 결함이 낳은 결과로 내면화한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는 그들의 삶이 의미 없지 않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을 불러주고 안부를 묻는 일, 느슨하더라도 연결망을 다시 잇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고립을 다루는 행정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민원이 걱정돼 자료를 줄 수 없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공무원들에게 가장 자주 들은 말이다. 은폐하고 축소한다고 사라질 문제는 아니다. 숨기기보다 드러내고, 관리보다 회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