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영화·공연·전시로 돌아본 문화부 기자들의 2025년
책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안녕이라 그랬어' '첫 여름, 완주'
영화 '남극의 쉐프' '콘클라베' 'F1 더 무비'
전시 '신라금관, 권력과 위신', 공연 '국악 파티: 열두마디', 연극 '혜영에게'
"올해 어떤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
연말이 되면 으레 이런 질문을 받는다. 취재로, 마감으로 한 해를 보낸 문화부 기자에게 이 질문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너무 많이 봤고, 너무 많이 읽었고, 또 너무 많이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한 문장 앞에서 눈길이 멈췄고, 어떤 화면에 사로잡혔으며, 어떤 무대에서는 우리의 전통이 마음에 울리는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게 됐다.
주말앤 팀 세 명의 기자가 '올해의 작품'을 골라보기로 했다. 비교도, 순위도 없다. 그저 한 해가 끝날 무렵까지 마음에 남아 있던 것 하나씩을 꺼내놓았다. 그렇게 골라온 각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올해의 책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이연정 기자
2022년 1월, 문화부로 발령 받아 미술을 맡게 됐을 때다. 전임 선배의 추천으로 (내가 읽어본 책 중 가장 두꺼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사서 (내가 관심 있는 부분만 골라) 읽었더랬다. 서양미술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이 한 권이 많은 도움이 된 반면, 대체 한국미술사는 왜 이렇게 책 종류도 많고, 어렵고, 방대하게 느껴지는지. 그래서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필생의 과업"이라고 한 이 책을 펴냈을 때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특히 K-컬처가 세계의 중심에 떠오른 올해,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역사를 비교적 읽기 쉽게 한 권에 담은 이 책이 속성으로(?) 교양과 상식을 쌓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안녕이라 그랬어>-김세연 기자
올해 문화부에서 문학을 맡게 되면서, 좀처럼 몸에 베이지 않던 독서 습관을 되살려 준 책이다. 단편 소설은 정들다 헤어지는 느낌이라 피했는데, 이 책은 읽는 내내 상황에 몰입해 공감하면서도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 많아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표제작 '안녕이라 그랬어'와 '좋은 이웃'이 인상 깊었다. 읽는 동안 감정에 깊이 빠지기보다는 "아, 이런 상황이면 나도 이랬겠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이 책은 '안녕'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하며 사람과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첫 여름, 완주>-최현정 기자
책판을 돌아가며 쓰면서 한 달에 1~2권씩 꾸준히 책을 읽게 된다. 그 덕에 '혼모노', '자몽살구클럽'처럼 보물 같은 소설들을 발견한 가운데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를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다. 작품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제작을 염두에 두고 반 희곡 형태로 쓰여 살아있는 대사의 말맛과 여름 풍경의 마을이 펼쳐지는 재미를 더한다. 많이 지친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누군가를 통해 기운을 얻고, 계속 나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올 한 해 각자의 '완주'를 마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올해의 영화
▶<남극의 쉐프>-이연정 기자
최근 화제가 된 OTT 속 드라마·영화에는 대부분 마약과 폭력, 욕설, 살인이 필수로 등장한다. 보다가 피로해져서 꺼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내게 남극의 쉐프는 그야말로 '힐링 영화'였다. 2010년 개봉한 이 일본 영화는 남극 돔 후지 기지에서 살아가는 대원 8명의 소소한 얘기를 담고 있다. 강추위와 고된 작업 속에서 이들을 위로하는 것은 조리 담당자의 맛있는 음식. 일본 가정식부터 화려한 만찬까지, 착착 재료를 다듬고 조리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원 각자의 삶 얘기가 주는 웃음과 눈물은 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카모메식당'을 좋아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다.
▶<콘클라베>-김세연 기자
개봉 직후 심야영화로 보러 갔는데, 솔직히 졸릴까봐 걱정했다. '콘클라베'는 신부님 이야기, 정적인 회의실, 단조로운 화면까지 졸릴 요소는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자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새로운 교황을 뽑기 위한 밀실 안에서는 권력과 의심, 계산이 숨 가쁘게 오갔고,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게 휘몰아쳤다. 특히 공정할 것이라 믿어온 신부님들이 조직의 논리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영화가 파고드는 것은 '누가 선택되는가'가 아니라 '조직은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가'다. 신앙과 양심의 이름 아래 진행되는 선택들이 과연 얼마나 투명한지, 그 질문이 마지막까지 따라붙는다. 종교 영화가 아니라, 공정과 의사결정을 다룬 가장 세속적인 스릴러처럼 느껴졌다.
▶〈F1 더 무비〉-최현정 기자
올해 기자에게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뜨게 해준 'F1 더 무비'를 올해의 영화로 뽑아본다. 브래드 피트가 한물간 드라이버 '소니 헤이스' 역을 맡아 다시 서킷에 복귀해 최하위권에 있는 팀을 성장시키는 이야기를 그렸다. 압도적인 속도감, 생소하지만 매력적인 모터스포츠 산업의 세계, 동료애 여기에 한스 짐머의 음악까지 더해져 좋았고 한때 속도를 잃은 인물이 다시 달릴 이유를 찾는 과정이 깊게 와닿았다. 올해 이 영화는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563만9천여 명을 모으며 국내 연간 박스오피스 4위에 이름을 올렸다. 덕분에 기자처럼 이 영화로 F1 스포츠에 입문하게 된 사람들은 실제 레이스를 챙겨보고, 각 팀의 역사, 피트 운영 전략, 드라이버들의 개성과 심리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알게 됐다.
◆올해의 전시, 공연, 연극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금관, 권력과 위신'>-이연정 기자
전시 개막 전 언론공개회에 참석할 때 "아, 다시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 전시가 간혹 있다. 전시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이 너무 몰릴 것 같은 예감에서다. 올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론 뮤익전'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금관전'이 그랬고, 실제로 개막 이후 오픈런할 정도의 인기로 인해 쉽게 볼 수 없는 전시가 됐다. 당시 언론공개회에서 넋을 놓고 금관을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100년 만에 모인 6점의 금관들은 생각보다 더 화려하게 반짝였고, 그 빛이 품은 천 년의 역사를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다시 보고 싶지만 아직도 열기가 뜨거워 그럴 수 있을까 싶다. 아무튼 신라금관전은 올해의 전시가 아니라 아마 인생의 전시가 될 듯 싶다.
▶<대구시립국악단 '국악 파티: 열두마디'>-김세연 기자
"국악이 이렇게 힙(Hip)했다니"
솔직히 말해 그동안 문화생활이랍시고 클래식 오케스트라만 보러 다녔지, 정작 우리 것인 국악 공연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12월 크리스마스 선물같이 만나 무대가 바로 이 공연이었다. 국악 공연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멜로디가 가야금과 해금, 대금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귀가 먼저 멈칫했다. 익숙한 선율인데 이상하게 더 따뜻하고 더 예쁘게 들렸다. 이어 래퍼까지 등장해 국악 선율 위로 랩을 얹자 공연장은 말 그대로 '국악 파티'가 됐다. 올해 유독 많은 공연을 봤지만, 끝나고 나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바로 든 무대는 많지 않았다. 이 무대에서 국악은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놀 수 있는 것'에 가깝다. 그 거리감의 변화가 인상 깊었다.
▶<극단 헛짓 '혜영에게'>-최현정 기자
올해도 많은 공연이 무대에 올랐고 문화부에 있으면서 다양한 공연을 접할 수 있는 한 해였다. 하나의 공연이 펼쳐지기까지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기에, 어느 작품 하나를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지난 가을 관람한 극단 헛짓의 '혜영에게'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가 '선의'라고 믿는 행동이 과연 타인에게도 선의일 수 있을까. 너무 쉽게 판단이 이뤄지는 시대에 잠시 멈춰 생각할 지점을 남긴 연극이었다. 극의 연출 방식 또한 음악, 무대장치도 최소한으로만 했다. 무대 중앙에 놓인 노란 천과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겨울의 눈을 밟는 감각을 대신한다. 그것만으로도 서정성을 잃지 않으면서 강한 흡입력을 만들어냈다. 여러 호평과 함께 올해 '혜영에게'는 월드 2인극 페스티벌에서 지역팀으로 유일하게 참가해 3관왕을 수상하는 경사를 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