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매일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작 '하나, 둘, 셋, 넷, 다섯.' / 정경미

입력 2026-01-01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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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재경 작가
일러스트 : 김재경 작가

도둑이 되고 말았다. 교실에 떨어진 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선생님께 가져다 주는 내가 도둑이라니. 성능 좋은 최신 휴대전화를 훔친 도둑도 아니고, 돈을 훔친 도둑도 아니고 반장이라는 감투를 훔친 반장 도둑.

"주호야, 오늘 반장 선거 한다고 했지? 너도 반장 한번 나가 봐."

중학교 2학년인 형이 아침밥을 먹으며 밥맛 떨어지는 말을 했다. 인기가 많아 반장을 수시로 했던 형은 내 맘을 너무 모른다. 형, 나도 반장이 하고 싶어. 하지만 추천도 안 해주고 설령 추천받는다 해도 몇 표 나올지. 창피나 안당하면 다행이거든.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상해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형, 반장 그거 해서 뭐해. 귀찮기만 해. 하기 싫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퉁퉁거리는 말투에 형이 내 본심을 알았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등굣길에 옆 동에 사는 민철이를 만났다. 학원을 많이 다녀서인지 민철이 가방은 돼지 저금통처럼 배가 불룩했다. 가방 무게 때문에 뒤로 넘어질 듯 보였다.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졌다. 민철이가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 내 우산을 같이 썼다. 불룩한 민철이 가방까지 씌워 주었더니 오른쪽 어깨가 축축해졌다.

4교시, 반장 선거 시간.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민철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나를 추천했다. 나는 이름을 잘못 들었나? 우리 반에 나 말고 김주호가 또 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왜 나를…. 아침에 우산 씌워줬다고 추천하나? 난생처음 반장 후보가 되니 기분이 어리둥절했다. 선생님께서 김주호라는 내 이름을 칠판에 적으셨다. 힐끔거리며 이름을 쳐다볼 때마다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 심장은 콩닥거렸다.

후보는 나와 수경이 그리고 인기가 많은 진태, 이렇게 세 명이었다. 진태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했다. 거기다 다정하고 유머감각까지 있는, 내가 봐도 멋있는 아이였다. 그런 진태와 경쟁을 해야 하니 내가 반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후보가 세 명이니 운 좋으면 부반장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슬쩍 들었다.

진태는 큰 키와 달리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날 뽑아준다면 무척 고맙겠습니다."

거창한 공약은 없었다. 뽑아주면 고맙다고 말하며 웃음 한 번 날린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 말이 뭐라고. 친구들은 야! 우! 하면서 크게 손뼉을 쳤다.

"나는 반장은 하기 싫습니다. 부반장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부반장이 된다면 반장을 도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수경이는 튀어 오르는 공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부반장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진태와 수경이가 공약을 발표할 동안, 나는 너무 떨려 속이 울렁댔다. 후보가 될 줄 몰랐으니 당연히 발표 연습도 안했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진태처럼 '날 뽑아 주면 고맙겠다'라고 말할까? 그럼 따라쟁이라고 웃겠지? 그냥 열심히 일하겠다고 할까? 에이 너무 밋밋해.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어…. 어, 내가 반장이 된다면... 어... 학급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어…. 깨끗한 교실로 만들고 단합이 잘 되는 반을 만들겠습니다."

나는 주눅 든 목소리로 '어어' 거리며 어벙하게 발표했다. 가뜩이나 붉으스럼한 얼굴은 왜 그렇게 화끈거리는지. 이럴 때 친구들이 진태에게 했던 것처럼 우렁찬 박수를 쳐 주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은데, 친구들은 내 발표에 관심이 없는 듯 작은 박수만 쳐 주었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우리 반은 모두 스물여덟 명. 나는 내가 몇 표를 받을 수 있을지 속으로 세어 보았다. 나를 추천한 민철이, 나, 내 짝 그리고 같은 교회 다니는 성수와 다정이. 적어도 다섯 표는 나올 거야. 또 누가 알아? 표가 예상보다 많이 나올지. 계산을 하다 보니 웃음이 입꼬리로 살짝 삐쳐 나왔다.

"이진태, 이진태, 이진태."

진태 이름만 연달아 나왔다. 가끔 수경이 이름도 있었다. 쪽지 스무 장을 펼 동안, 내 이름은 한 번도 불리지 않았다. 칠판에 적힌 김주호라는 이름 아래 칸은 막대 줄 하나 없이 비어 있었고, 마음 속은 창피함으로 가득 찼다. 제발 한 표라도 나와 줘 제발. 간절히 바랐다.

"이제 세 장 남았네."

개표하던 아영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제야 '김주호'라는 내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막대 하나가 내 이름 아래 그였다.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안다면 그 한 표가 차라리 나오지 않는 게 더 좋았다. 개표가 끝났고 진태 스물한 표, 수경이 여섯 표, 나는 내가 적은 한 표만 달랑 받았다.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민철이 자식, 날 뽑지도 않을거면 뭐하러 추천해서 이런 수치심을 주는 거야. 나는 맨 앞줄에 앉아 까불거리고 있는 민철이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도 잠시, 곧바로 기가 찬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진태가 앞으로 나가더니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개표하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 반장을 못할 것 같습니다. 너무 미안하고 수경이와 주호에게 사과합니다."

진태는 왜 반장을 못하는지 변명도 하지 않고 반장 자리를 내려 놓았다. 선거 원칙으로 보면 두 번째 표를 많이 받은 수경이가 반장이 되어야 하지만, 수경이는 처음부터 부반장을 하겠다고 말했다. 하! 이게 무슨 일인가? 이렇게 해서 내가 반장이 되고 말았다. 한 표를 얻고 반장이라니, 그것도 내가 적은 한 표를 얻고 반장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잠자던 사자가 벌떡 일어나 웃을 일이었다.

내가 원했던 반장이 되었지만, 우쭐거리기는커녕 반장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게다가 한 표 받고 반장이 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줄줄이 닥쳤다. 4학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다.

"4학년 3반 반장, 한 표 받고 반장이 되었대."

"그 한 표도 자기가 찍은 표라 하던데."

"야, 나 같으면 부끄러워 못 하겠다."

"반장자리 훔친 것 같아."

아이들은 한 표 받고 반장을 하는 게 싫었던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처럼 내가 반장 감투를 훔친 것으로 여겼다. 게다가 '어이, 한 표 반장, 한 표 반장' 재미삼아 그렇게 부르는 애들도 있었다. 그러다 '한 표 한 표'가 발음이 비슷한 암표가 되면서 급기야 암표반장이 되어 벼렸다. 암표라면 인기 많은 콘서트나 스포츠 경기를 할 때, 뒤에서 비싸게 파는 표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나는 도둑 반장, 암표 반장이 되었다. 내가 결코 이런 반장을 원했던 게 아니었는데 선거 이후, 나는 반장의 '반' 자만 들어도 삼십육계 달아나고 싶었고, 반장이라는 감투는 엉망진창으로 내게 씌워졌다.

미술 시간.

"얘들아, 오늘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자. 잘 그린 그림을 골라 학급 게시판에 붙일 거니까 최선을 다해 그려보자."

선생님께서 수업 과제를 내셨다. 그림이라면 사생 대회에 나갈 때마다 상을 척척 받아오는 아영이가 제일 잘 그렸다. 모두 자신의 그림을 게시판에 걸고 싶은지 그림 속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해서 그렸다. 그리기를 마친 뒤, 친구들은 아영이 그림을 보기위해 아영이 주위에 몰렸다.

"아영아, 넌 그림을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려? 그런데 이게 무슨 그림이야?"

"연필 스케치야. 사실적으로 그린다고 그렸는데 어때?"

"사실적인 게 뭐야?"

"그림이 실제와 똑같이 닮았다는 말이야."

"맞아! 그림이 반장 선거 때랑 똑같아."

반장 선거라는 말에 갑자기 머리끝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곤두섰다. 그림 보다가 반장선거가 왜 나오지? 아영이 그림이 궁금했다. 고개를 쭉 빼서 앞에 앉은 아영이 그림을 보았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아영이가 반장 선거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다. 투표 쪽지를 펴는 아영이와 그걸 지켜보는 또랑또랑한 친구들 얼굴. 거기까진 좋았다. 칠판에 적힌 이름 아래 막대 개수까지 똑같이 그렸다. 유명한 화가라도 되는 듯, 연필로만 그린 아영이의 그림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선거 때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아영이 그림을 보며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내 이름 아래 막대 한 개가 그어진 그림이 게시판에 붙을 상상을 하니 땅바닥에 퍼질러 울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형에게 물었다.

"형, 나 어떡해!"

울먹이며 형에게 암표 반장, 반장 도둑, 그리고 아영이 그림 이야기를 털어놨다. 형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해법을 내려 주었다.

"주호야, 네가 잘못한 게 없잖아. 그러니 부끄러워 마. 피하지도 말고. 당당하게 부딪혀. 그게 정면승부야."

"정면승부? 그거 어떻게 해야 해?"

"반장이니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이 암표라 해도 속상해 하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 그리고 그림이 걸려도 가볍게 웃으면서 넘겨. 그리고 반장은 봉사하는 자리야. 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반장 역할을 잘하면 그게 진짜 반장이야. 알겠지. 용기내고 할 수 있겠지?"

뭔지 잘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수경이와 내가 학급 게시판에 걸려고 고른 아영이 그림을 보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주호야, 아영이 그림은 빼는 게 낫지 않을까?"

선생님이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주저 했지만 그림을 보고 웃어넘기라는 형의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 아영이 그림이 제일 잘 그렸어요. 붙여도 괜찮아요."

정말 별거 아니었다. 마음을 살짝 바꿨더니 그림이 게시판에 붙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를 반장 후보로 추천한 민철이는 등굣길에 자주 부딪혔다. 가뜩이나 덩치 작은 민철이가 뚱뚱한 가방을 메고 걸으면 무척 힘들어 보였다. 나는 민철이 신발주머니를 들어주기도 했고, 가끔 책가방을 바꿔 메기도 했다. 그러면서 민철이와 단짝 친구가 되었다.

한번은 민철이가 다 지난 반장 선거 얘기를 했다.

"주호야, 반장 뽑을 때 너를 추천해 놓고 안 찍어서 미안."

"상관없어. 그런데 왜 날 안 뽑았니?"

"그날 네가 우산 씌워줘서 널 찍으려 했는데, 수경이가 뿌연 내 안경을 닦아줘서 수경이 찍었어. 웃기지?"

그제야 민철이가 나를 찍지 않은 의문이 풀렸다.

난 당당해지고 봉사하라는 형의 말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쉬는 시간에 칠판도 나서서 닦고, 차렷경례도 크게 말하고, 교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도 보이면 주웠다. 어렵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단원평가도 척척 풀었고, 친구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4학년 1학기가 그렇게 지나갔다.

2학기 반장 선거 시간.

"자, 2학기 학급을 이끌어 갈 반장을 추천해 보자. 1학기 때 임원을 했다 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는 거 알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민철이가 또 손을 들었다.

"저는 김주호를 추천합니다. 김주호는 공부도 잘하고, 남을 잘 돕습니다."

민철이가 나를 붕 띄우면서 후보로 추천했다. 갑자기 지난 선거의 악몽이 떠올라 헛딸꾹질이 났다. 이번에는 진태, 수경이, 나, 강준이, 이렇게 네 명이 후보였다. 역시 예상대로 진태 이름이 많이 나왔다. 진태가 다섯 표, 수경이가 한 표 나올 동안 내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또,또 내 이름이 없잖아. 저번처럼 한 표 나오면 어쩌지?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순간, 드디어 내 이름이 나왔다.

"김주호, 김주호"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연달아 나왔다. 땅바닥에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하늘로 치솟으며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개표가 끝났다. 진태 열일곱 표, 수경이 네 표, 강준이가 두 표였다. 나는 다섯 표를 받아 부반장이 되었다. 다섯 표!. 적다면 적지만, 나에게 더 없이 자랑스러웠다. 도둑 반장과 암표 반장이라는 별명을 싹 지워 주고, 일학기 때 반장 역할을 잘 했다는 표창장 같은 다섯 표였다. 난 더 이상 암표 반장, 도둑 반장이 아니었다. 다섯 표를 받은 부반장이었다.

교실 게시판에 아영이 그림이 아직 붙어 있었다. 햇빛을 많이 받아 흰 바탕이 누렇게 변했고, 사실적이라던 연필 선도 뭉툭해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영이의 그림 속, 내 이름 아래 다섯 개의 막대가 그어진 상상을 하니 또다시 웃음이 삐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