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예술가 삶의 궤적과도 같은 전시"…대구미술관 허윤희전

입력 2025-12-15 15: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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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시
목탄 드로잉 퍼포먼스 대형 작품부터
관집, 해돋이 일기 등 240여 점 전시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앉아 그렸지만 어느 것 하나 같은 장면이 없다. 허윤희 작가가 제주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마다 2시간 가량 현장에서 완성한 작품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앉아 그렸지만 어느 것 하나 같은 장면이 없다. 허윤희 작가가 제주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마다 2시간 가량 현장에서 완성한 작품 '해돋이 일기'. 총 146점이 벽면 가득 걸렸다. 이연정 기자
대구미술관에 전시 중인 허윤희 작가의 작품
대구미술관에 전시 중인 허윤희 작가의 작품 '해돋이 일기'. 이연정 기자
허윤희 작가의 신작
허윤희 작가의 신작 '빙하와 도시'는 대구의 지역성과 생태적 실존의 사유를 결합한 작품이다. 도시 중앙에 그려진 '83타워'가 눈에 띈다. 이연정 기자
허윤희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2001년 남프랑스에서 제작했던 대표작
허윤희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2001년 남프랑스에서 제작했던 대표작 '관집'을 새롭게 재구성해 선보였다. 관람객들은 관집 안에 직접 누워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이연정 기자
자신의 작품 앞에 선 허윤희 작가. 이연정 기자
자신의 작품 앞에 선 허윤희 작가. 이연정 기자

"지움으로써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죠. 창조하고 소멸하고, 또 창조해내며 순환하는 겁니다. 비록 내 에너지를 다 쓰더라도, 오히려 그 과정에서 얻는 충만함이 참 좋아요."

왜 애써 그린 그림을 다시 지우는 걸까. 최근 대구미술관에서 만난 허윤희 작가는 이 물음에 대해 이같이 답했다. 그는 90년대 독일로 유학을 떠날 때 물감 대신 비교적 가벼운 재료인 목탄을 들고 간 것을 계기로, 목탄으로 드로잉하고 다시 지우는 회화적 수행을 30여 년 간 이어오고 있다.

전시 개막일에 그는 수많은 관람객 앞에서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여 주목 받았다. 장대에 목탄을 묶거나 직접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높이 5m 가량의 대형 작품 '물의 평화'를 그렸다. 그야말로 온몸의 리듬으로 그려낸 작업. "식물과 동물이 공존하는 평화를 물에서 발견했다"는 작가는, 몸을 누인 평화로운 물가에 풀과 오리떼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 역시 전시가 끝날 때쯤 작가가 하얀 페인트로 모두 지워버릴 예정이다. 그의 작업은 남겨지는 결과보다 과정,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많은 이별을 겪으며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달았고, 순간의 진실함을 강조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그의 작업은 지워지더라도, 없었던 것이 되진 않는다. 누구나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지만 내면에는 그 과거의 기억이 층층이 쌓여있듯이. 그에게 지운다는 것은 단순히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상태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번 전시 제목인 '가득찬 빔'은 이처럼 채움과 비움,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함축한 말로, 작가가 직접 쓴 동명의 시에서 비롯했다.

허윤희 작가가 지난달 전시 개막식에서 목탄 작업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이연정 기자
허윤희 작가가 지난달 전시 개막식에서 목탄 작업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이연정 기자
허윤희 작가가 지난달 전시 개막식에서 목탄 작업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이연정 기자
허윤희 작가가 지난달 전시 개막식에서 목탄 작업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이연정 기자
대구미술관 2전시실에 전시 중인 허윤희 작가의 작품
대구미술관 2전시실에 전시 중인 허윤희 작가의 작품 '개가시나무는 살아있다'와 멸종위기식물을 그린 작품들. 이연정 기자

이번 전시는 작가의 제25회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시다. 회화부터 드로잉, 조각, 영상 등 24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예술 여정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3전시실은 그의 독일 유학 시절 작업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고립과 언어의 단절 속 '나는 누구인가, 예술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시기를 다룬다. 자신만의 책과 정원을 만들며 내면의 세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유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의 예술세계의 기초를 이뤘다.

전시실 중앙의 작품은 2001년 남프랑스에서 제작한 대표작 '관집'을 재현했다. 하루가 인생이라면 아침은 탄생, 밤은 죽음이라는 작가의 사유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집과 관을 하나로 결합해 삶과 죽음이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 있음을 시각화했다. 이 작품은 관람객이 작품 내부에 들어가 누워보며 체험할 수 있다.

그는 "작품들이 어둡고 무겁게 표현된 것 같지만, 되돌아보면 젊었기 때문에 뭔가 찾고 헤쳐나가려 했던 젊은 날의 초상 같은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2전시실은 그가 귀국 이후 실존의 문제의식에서 생태적 사유로 확장해 온 여정을 보여준다. 그는 재난, 환경 파괴, 멸종 위기 등 현대 사회의 생태 현실을 마주하며, 작업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일깨운다.

특히 광릉요강꽃, 분홍장구채, 나도풍란, 지네발란 등 이름조차 생소한 멸종위기식물들을 마치 영정사진처럼 그린 '사라져 가는 얼굴'과 '개가시나무는 살아있다', 그리고 10여 년 간 쓴 '나뭇잎 일지'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의 백미는 '해돋이 일기'다. 쉰 넘어 제주로 이주한 이후, 새벽 일출을 보며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던 생생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시작한 작업이다. 2년 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앉아 2시간 가량 걸려 완성한 그림들은 어느 것 하나 같은 장면이 없다. 전시된 '해돋이 일기'는 총 146점.

작가는 "젊었을 때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싫어 색을 멀리하고 목탄만 고집했다"며 "해돋이 일기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색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어떤 색을 써도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성숙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전시는 30여 년 간 예술가로서 걸어온 삶의 궤적과도 같다. 사라짐과 비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순환하고 다시 피어나는 생명의 흐름을 그리며, 인간과 자연히 서로 닿는 지점을 바라보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2일까지 이어지며, 도슨트 해설과 연계 교육 프로그램이 전시 기간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