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보고회에도 싸늘한 기업…정작 반도체특별법 처리는 지연

입력 2025-12-10 15: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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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패권 경쟁 격화 속 정부는 비전만 제시…국회는 핵심 법안 발목
R&D 탄력근로 빠진 반쪽 법안…업계 "지금은 말보다 규제 풀 시점"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 보고회를 열고 팹리스(설계 전문 기업) 매출 10배 확장 등을 통한 '글로벌 반도체 2강 도약' 비전을 발표했지만 정작 산업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정부가 'K-반도체 비전'을 내놓는 사이 국회는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반도체특별법 처리를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국이 파격 지원을 등에 업고 질주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규제에 발목 잡혀 있다는 불안이 업계 전반에 퍼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산·학·연 관계자 40여 명과 함께 '인공지능(AI) 시대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국내 팹리스 매출을 10배로 확대하고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해 글로벌 반도체 2강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제조 역량 초격차 유지, 특성화 대학원 확대, 클러스터 조성 등 비전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장의 눈길은 여전히 법과 제도에 쏠린다. 반도체 산업을 뒷받침할 핵심 법안은 여야 정치 갈등에 갇혀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4일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켰지만 연구개발(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끝내 담지 못했다. 여야는 근로시간 특례 논의를 계속하겠다는 부대의견을 달았으나 실효성은 미지수다. R&D 인력이 몰아서 연구할 수 없는 구조라면 기술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업계에서 반복돼 왔다.

법사위는 이날 이 법안을 가결해 본회의 상정 가능성은 열었지만, 정기국회 내 처리는 불투명하다. 사법개혁 등 정치 현안이 충돌하면서 반도체 법안이 줄곧 뒷순위로 밀린 탓이다. 산업계가 "말로는 반도체 국가전략산업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입법 속도가 가장 느리다"고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경쟁 상황은 훨씬 가파르다. 중국은 '996 근무제'를 앞세워 R&D·양산 속도를 극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CXMT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맞먹는 수준의 DDR5 D램을 공개했고, YMTC는 270단 3D 낸드플래시로 시장 판도 변화까지 예고했다. 미국은 엔비디아의 H200 칩 대중 수출을 조건부로 허용하며 시장 재편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고 있다. 격차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한국만 제자리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 같은 압박 속에서 정부의 전략보고회는 업계 기대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비전 제시는 있었지만, 산업계가 가장 절박하게 요구하는 규제 완화와 근로 유연성에 대해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업계 한 관계자는 "대통령 주재 보고회가 열렸지만 정작 기업이 원하는 내용은 법안 한 줄로도 해결할 문제"라며 "기술 투자가 시급한 시점에 정치 일정 때문에 R&D 인력 운용조차 유연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도 "반도체 산업은 시간이 경쟁력인데 한국은 제도 논쟁에만 시간을 보낸다"면서 "2030년을 전후해 중국에 기술 우위를 내줄 수 있다는 경고가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기업이 체감하는 규제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육성 비전도 산업 경쟁력 회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