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해군 함정 광무호·광제호의 비참한 말로[김용삼의 근대사]

입력 2025-12-02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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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대한제국 최초의 순양함으로 알려진 양무호. 실상은 석탄운반선에 포 몇 개를 달아 바가지를 씌운 제품이었다.
대한제국 최초의 순양함으로 알려진 양무호. 실상은 석탄운반선에 포 몇 개를 달아 바가지를 씌운 제품이었다.

최근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 사업과 관련하여 미국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이 사업이 공식화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이 한국에 전략무기인 원자력 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문제는 미사일 사업과 연계하여 보면 그 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미국은 1979년부터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 미사일기술 통제 체제(MTCR)를 통해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와 탄두 중량을 적극 통제해 왔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미사일 통제 지침을 폐기한 것은 2021년이다. 이로써 한국은 42년 만에 미사일 개발과 관련한 모든 족쇄가 완전히 풀렸다. 현재 한국은 탄두 중량 8~9톤, 3천~5천㎞의 사거리를 가진 괴물 미사일(현무 V-2)을 실전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42년 동안 한국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500~800㎞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한 이유는 서울-베이징 간 거리(956㎞)와 깊은 연관이 있다. 미국과 중국이 밀월 관계를 유지하던 시절이었으니 한국 미사일이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통제한 것이다.

고종은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고 외국에서 빚을 내어 칭경예식을 준비하고 외국 귀빈을 초청하려 했다. 하지만 콜레라 창궐과 러일전쟁으로 끝내 이 행사는 불발되었다. 사진은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세운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고종은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고 외국에서 빚을 내어 칭경예식을 준비하고 외국 귀빈을 초청하려 했다. 하지만 콜레라 창궐과 러일전쟁으로 끝내 이 행사는 불발되었다. 사진은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세운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시진핑(習近平) 체제 이후 중국이 미국의 태평양 질서에 반기를 들면서 미·중 신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중국을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한미 미사일 지침이 폐기된 것이다. 미국 정부가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것은 미중 신냉전이 열전으로 본격화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원자력 잠수함 사업이 상징하듯 이제 한국의 방위산업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톱 수준에 올랐다. 각종 첨단 미사일과 로켓은 물론이요, 자주포(K-9)와 흑표 전차, 초음속 제트 전투기, 이지스 함정까지 건조하여 해외에 수출하는 국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시간을 구한말로 돌리면 참혹한 모습이 눈앞에 전개된다.

◆19세기말 조선 군사력의 실상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병인양요·1866), 미국 함대의 강화도 공격(신미양요·1871) 때 서양 열강들은 철제 증기선과 대구경 함포, 최신예 소총으로 조선군을 공격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은 기함 콜로라도호(3,425톤) 등 5척의 군함에 최신예 함포 85문을 탑재했고, 해병대 1,230명은 엎드린 자세로 1분 당 10발 이상 쏠 수 있는 레밍턴 소총으로 무장하고 강화도에 나타났다.

반면, 조선은 해군 군함은 한 척도 없었고, 육상에 설치한 대포는 사거리 300~400보 정도의 돌덩이를 날려 보내는 대완구포, 사거리 800보 정도의 전근대식 총통이었다. 병사들은 선 자세로 장전하여 1~2분에 겨우 1발을 쏠 수 있는 화승총으로 무장했다.

1892년 주한 일본 공사로 부임하여 방곡령 사건을 일으킨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已)는 "조선은 국가를 조직하는 골격이 모두 붕괴하여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국가 해체 상태에 이른 조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종이 일본 가와사키조선에 주문하여 도입한 광제호. 이 배도 군함으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관세국이 운영한 등대 순시선 겸 세관 감시선이었다. 이 배는 한일합방 후 총독부 소속이 되어 항로표지 관리업무를 담당했다.
고종이 일본 가와사키조선에 주문하여 도입한 광제호. 이 배도 군함으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관세국이 운영한 등대 순시선 겸 세관 감시선이었다. 이 배는 한일합방 후 총독부 소속이 되어 항로표지 관리업무를 담당했다.

'강대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면서도 국경을 방위할 군사가 한 명도 없는데다가 해안에 군함이나 군항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국방력이 아프리카 토인보다 못한 세계 최악이다. 관리의 부패와 뇌물수수로 정부의 재정이 궁핍하고 경제 전체가 침체되었으며, 근대식 교육제도가 미비하여 앞날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할 만한 인재도 없으니 조선은 망한 나라나 다름없다.'(한철호, 「개화기(1880~1906) 역대 주한 일본 공사의 경력과 한국 인식」, 『한국사상사학』 제25집, 한국사상사학회, 2005, 294쪽)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1896년 조던 주한 영국 총영사는 본국 정부에 "조선 군대는 서울과 지방군을 합쳐 총병력 7,500명이지만, 지방군은 거의 무시될 정도"라고 보고했다. 윤치호는 이 무렵 조선군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7,500명이나 실제로는 4천 명에 불과하며, 이들 중 일부가 수도 서울의 치안과 궁성 수비를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군 병력의 실체는 러시아 측 자료로도 확인된다. 러시아는 1896년 10월 경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조선의 중앙군 총병력은 5개 대대로 구성된 3,315명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했다(러시아 탁지부 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자료조사실 편역, 『국역 한국지-본문 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678쪽). 이것이 당시 조선군의 실상이었다.

그전까지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까지 육로로 진격해 왔고, 병자호란 당시 여진족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다. 그런데 병인양요·신미양요를 통해 서양 오랑캐들은 군함을 타고 수도 코앞까지 쳐들어와 왕궁을 위협하자 해양 방어를 위한 근대 해군 창설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1903년 7월 23일, 군부대신 윤웅렬은 "대한제국은 삼면이 바다인데도 한 명의 해군과 한 척의 군함도 없어 한심스럽다는 빈축을 사고 있으니 이보다 수치스러운 일이 없다"라며 해군 창설을 주장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1903년 미국이 진수한 장갑 순양함 콜로라도호는 배수량 1만 3,900톤에 8인치 주포 4문, 6인치 함포 14문을 탑재한 거함이었다. 배 한 척 가격이 375만 달러였다. 3년 후인 1906년 영국이 진수한 당대 최강의 불침 전함인 드레드노트함(배수량 1만 8,410톤, 12인치 주포 10문, 3인치 부포 27문)은 척당 가격이 무려 875만 달러였다.

이 무렵 대한제국 정부의 연간 예산은 1천만 원. 대한제국이 드레드노트급 전함 한 척을 구입하려면 무려 3.5년 치 국가 총예산을 투입해야 할 정도로 근대 해군력 건설은 막대한 비용과 당대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총동원되는 대사업이었다.

◆해군도 없는 상황에서 배부터 도입

양무호 도입 120년 후 한국은 이지스함을 자체 건조하여 운용하는 방산 선진국으로 발전했다. 사진은 국내에서 독자 설계하고 건조한 8,200톤 급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인 정조대왕함.
양무호 도입 120년 후 한국은 이지스함을 자체 건조하여 운용하는 방산 선진국으로 발전했다. 사진은 국내에서 독자 설계하고 건조한 8,200톤 급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인 정조대왕함.

고종은 배를 운용할 해군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군함부터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대상 선박은 일본 미쓰이물산 소속의 석탄 운반선 카치다테마루(勝立丸)였다. 길이 105m, 3,424톤의 이 배는 1881년 영국에서 건조한 증기 추진 화물선으로 13년 동안 사용했다. 1894년 미쓰이물산은 이 중고 선박을 25만 엔에 구입하여 석탄 운반선으로 개조하여 운용했다. 이 배는 증기엔진의 열효율이 대단히 낮아 하루에 43톤의 석탄을 잡아먹는 등 유지운용비가 많이 들어 골치를 썩이던 중 '대한제국'이라는 봉을 만났다.

일본 정부는 선령이 22년이나 된 고물 석탄 운반선 갑판에 구경 80㎜ 포 4문, 5㎜ 기관포 4문을 달아 장교 25명, 수병 200명이 탑승하는 순양함으로 속여 1903년 4월 15일 대한제국에 매각했다. 배의 구입비는 일화 55만 엔, 대한제국 화폐로 110만 원이었다. 이 금액은 대한제국 정부 연간 총예산 1천만 원의 11%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1차분 대금 20만 원을 치르고 서둘러 도입한 이 배에 고종은 '나라의 무력을 키운다'는 뜻에서 양무호(揚武號)라고 명명했다.

대한제국은 미쓰이물산이 영국으로부터 25만 엔에 구입하여 사용하던 고물 중고 선박을 55만 엔에 떠안았으니 크게 사기를 당한 셈이다. 이 내용이 독일 신문에 보도되어 국제적 비난이 일었다. 양무호는 명칭만 순양함이었을 뿐 워낙 낡은데다가 속도가 느려 훈련함으로도 사용이 곤란했다. 게다가 탑재된 80㎜ 함포는 서양 열강의 장갑 순양함이나 전함 선체에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엉터리 고철덩어리를 서둘러 구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부 학자들은 고종이 자신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 때 초청한 외국 귀빈을 위한 예포 발사용으로 도입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문제는 이 덩치 큰 배를 운용할 해군 인력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황성신문은 단 한 명의 수병도 없는 상황에서 군함을 구입한 것은 재정 낭비라고 강력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1903년 6월 1일자). 게다가 증기 엔진 효율이 워낙 낮아 막대한 유지관리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이 배는 도입 즉시 항구에 처박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고종이 국고를 탕진해 가면서 준비한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도 콜레라 창궐과 러일전쟁 발발로 열리지 못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에 군사 행위 금지령을 내리고 양무호를 징발했다. 1905년 일본 해군의 정밀 검사 결과 선체와 기관이 노후화된 양무호는 군함으로 사용 불능 판정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양무호의 무장을 제거한 후 군수물자 수송선, 실습선으로 사용하다가 대한제국에 반환했다.

결국 사고뭉치 양무호는 1909년 일본 하라다기선(原田汽船)에 4만 2천 엔의 헐값에 매각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55만 엔 주고 도입한 배를 제대로 이용도 못하고 항구에 처박아 놓았다가 4만 2천 엔에 되팔았으니 50만 엔의 막대한 손해를 떠안은 셈이 되었다. 하라다기선 소속 화물선이 된 양무호는 1916년 싱가포르로 항해하던 중 침몰하여 수명을 다했다.

◆광제호는 군함이 아니라 등대 순시선

1904년 11월, 대한제국은 일본 가와사키(川崎)조선 고베조선소에서 건조한 선박 한 척을 도입했다. 길이 66.7m, 선폭 9.1m, 총 배수량 1,056톤, 최대 속도 14.7노트, 3인치 포 3문을 탑재하고 있었다. 고종은 이 배를 광제호(光濟號)로 명명했다. 광제호가 시중에는 군함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등대 감시와 세관 순시용으로 사용된 등대 순시선(Light Tender)이었다. 배에 함포를 설치한 이유는 등대에 무단 침입하는 선박을 퇴치하기 위한 용도였다.

광제호가 도입된 후 신문보도에 의하면 대한제국 총세무사로 근무한 영국인 브라운이 이 배를 개인요트처럼 사용했으며, 대한제국 정부 고관들도 자주 인천에 내려와 이 배에서 연회를 했다고 한다. 고관대작들의 뱃놀이용 선박이었다는 뜻이다.

한일합방이 되자 광제호는 코사이마루(光濟丸)로 선명이 바뀌었고, 총독부 관용선으로서 인천항 초계, 항로표지관리 업무를 수행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광제호는 조선에서 마련한 구호품을 일본까지 수송했고, 회항 길에 재난에서 살아남은 조선 동포 500명을 태우고 부산항에 입항했다.

1925년 조선우선주식회사에 매각되어 원산-청진 간 연락선으로 사용되었으며, 1940년까지 진해 해원양성소 실습선으로 이용됐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 배를 석탄운반선으로 전용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본토 수송에 동원되어 일본 정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대한제국이 없는 살림에 무리하게 도입한 양무호, 광제호는 일본 좋은 일만 하다 비참한 운명을 맞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