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변별력 확보 위해 고난도 문항 다수 출제
학생들 사교육 도움받으러 다시 과외·학원으로
"칸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의식하는 것은 인격이다'와 '영혼이 자기의식을 한다'라는 두 전제 모두 납득하는 것으로 보지만…."
언뜻 보면 철학사상 논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 14~17번 지문으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인격 동일성 이론'을 다룬 내용이다. 이 문제를 두고 학교·입시업계뿐 아니라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지문 난이도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충형 포항공대 철학과 교수는 "지문을 이해하는 데만 20분이 걸렸다"며 "지문 속 지속성이라는 개념은 고등학생이 이해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라고 말했다.
독해 능력 이론인 '단순 관점'에 관해 묻는 1~3번 지문과 물리학의 '열팽창 현상'을 다룬 10~13번 지문에서도 유사한 반응이 나온다. 지문에서 다룬 소재를 수십 년간 연구한 교수들마저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고3 학생들이 풀도록 하는 게 수능의 본래 취지와 맞냐는 지적이다. 8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45개의 문제를 모두 풀기 위해서는 1문항당 1분 40초 남짓이 주어진다. 전공자도 이해하는 데 20분이 걸린 지문을 수험생들이 5~6분 내에 온전히 이해하고 3, 4개의 문항을 푼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수능에서 이 같은 고난도 지문들이 속출하는 이유는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 배제 기조 속에서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 2023년 6월 수능 5개월을 앞두고 사교육비 경감과 공교육 정상화 대책으로 킬러 문항 배제 방침을 발표했다. 공식적인 킬러 문항의 정의는 '불필요하게 어려운 문항' '높은 수준의 추론·고차원적 접근 방식을 요구하는 문제' '공교육 학습만으로는 풀이 방법을 생각하기 어려운 문항' 등이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이 같은 정부 방침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토로한다. 킬러 문항을 배제하는 대신 최상위권과 상위권의 변별력 확보를 위해 고난도 문항을 다수 배치하며 오히려 수험생들의 체감 난도가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지역 한 고교 진학부장은 "차라리 과거 킬러 문항 1, 2문제 나올 때가 나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며 "킬러 문항을 킬러 문항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홍길동 수능"이라고 말했다.
수능의 전반적인 난이도가 높아지면 학생들은 결국 과외나 학원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공교육 내에서 배운 내용이라 하더라도 정답률 1%대의 문제를 더 빨리, 정확히 풀기 위해서는 결국 사교육의 도움을 받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중·고등학생 사교육비가 29조원을 넘어서며 4년 연속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통계가 이러한 현상을 방증한다. 실제 올해 수능이 소위 '불국어'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지역 학부모 커뮤니티에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국어 학원에 대한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부는 3년 전 야심 차게 내놓은 사교육 경감 대책이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한다. 수능 상대평가 체제, 정시 확대 기조 등 교육 제도 및 학벌주의, 정규직·비정규직 소득 격차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킬러 문항 배제라는 단순 미봉책만으로 현재 대학 입시에 모든 것을 거는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 있을 것인지. 매년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는 내용만으로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적정 난이도 문항을 고르게 출제했다"고 자평하기엔 학생, 학부모 등 교육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