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석 국민대 객원교수
요즘 한 배우의 뉴스가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팔자는 그를 의열단 저격수 '속사포'로 기억한다. 영화 <암살>에서다. 대중의 애정이 깊었던 만큼 실망도 컸을 것이다. 그가 조용히 배우 본업에만 충실했다면 이렇게 일이 커졌을까? 의도적으로 구축한 선한 이미지가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대중에게 가식(假飾)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이렇듯, 때론 현재 이상으로 과거 기억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정체성과 브랜드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가식'은 항상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국가 정체성을 수호해야 할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잡은 정파는 어떻게든 그들의 집권 정당성을 확고히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정권 교체기마다 '역사전쟁'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건국절 논쟁'이다. 언제나 논쟁은 치열하지만, 접점이 없고 결론도 쉽게 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로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정파들은 때때로 그냥 '논란거리'를 필요로 하고, 그 논란을 유지하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을 뿐인 경우가 많다. 권력자가 목표를 달성했거나 당장의 위기를 벗어난 경우, 굳이 끝까지 고집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게 잠복해 있다가 정치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되면 다시 점화시킨다.
최근 여권발 '12·3 국가기념일 지정 시도'도 비슷한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현 권력자와 집권세력이 역사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박제하려는 의도로 보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4·19', '5·18'도 적용되지 않았던 '법정 공휴일'로 정하겠다니, 그런 의구심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시민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①현 집권세력의 정치적 우위를 '기정사실화'하여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지층을 재결집시키며, ②'내란종식 프레임'을 내년 선거 때까지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란 관측이다. 또 ③정치적으로 불리한 이슈가 커질수록 국면을 전환할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서사 선점 전략'으로도 읽힐 수도 있다. 이는 동서고금 대부분 권위주의 정권이 '기념일'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기념일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공동체에 치명적인 해악을 남긴다. 첫째, 국가의 기억을 정파적 소유물로 만드는 순간 공동체는 분열되고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기념일'의 핵심 기능은 '공통의 기억을 통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적 계산이 담긴 기념일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폐기되거나 조롱의 대상이 된다. 나치나 소련, 남미 군사정권들이 만든 기념일들은 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고, 남은 것은 역사적 오점뿐이었다. 강요된 기억은 '홍보물'이고 그저 '정권의 이벤트'에 불과하다. 셋째, 무엇보다 자의적으로 재단된 기억의 강요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과 해석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기억의 개방성'을 전제로 하는데, 현재 진행되는 방식은 그 개방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을 훼손하는 것이다.
국가기념일 제안자는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하고 이름도 짓겠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여론조사에는 특정 정치 성향의 국민들만 참여하는 상황이다. 현 정권에 반대하는 반수의 국민들은 조사에 무관심하고 참여하지 않는다. 기법을 써서 모집단을 수정한다 해도 현재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시간 여유를 두고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집권세력이 사법부와 검찰 등 사정기관을 대하는 태도를 봐서, 당장 이런 요구가 반영될 것 같지는 않지만 계속 요구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최고 권력자의 사법리스크와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니 말이다.
정권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기억'을 건드리는 일만큼 위험한 선택은 없다. 역사는 언제나 '기억을 독점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국민의 기억은 정부의 것이 아니며, 특정 정권의 서사를 국가적 진리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주권의 날'이라는 새로운 기념이벤트가 아니라, 시민의 민주적 의사표시를 독려하고 수용해 '국민주권'을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