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해양력 활용한 웅진 백제의 부활-중국 지역 교류와 일본열도 진출

입력 2025-11-25 0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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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만 한강 하구 해륙 요충지…남북 연근해·황해 항로 결절점
백제 '전성했을 때 강병 100만'

무령왕릉 출토 금관 장식(한성백제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금관 장식(한성백제박물관).
인덕천황릉 백설조고분.
인덕천황릉 백설조고분.
무열왕를 출토 관(금송으로 제작).
무열왕를 출토 관(금송으로 제작).
무령왕릉 출토 신수.
무령왕릉 출토 신수.
익산 입점리 고분 출토 금동관.
익산 입점리 고분 출토 금동관.
일본 큐슈 중부 후나야마 전방후원분(백제계로 추정).
일본 큐슈 중부 후나야마 전방후원분(백제계로 추정).
서울 아차산 개로왕 추정 무덤.
서울 아차산 개로왕 추정 무덤.
화성 요리고분 금동신발.
화성 요리고분 금동신발.
후나야마 고분 출토 신발.
후나야마 고분 출토 신발.

지금 동아시아 해양에서는 한국과 북한, 중국, 대만,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합세해 해양력 경쟁을 벌이고 있다. 8개 이상 해역에서 영토 갈등이 벌어지고, 우리도 '3+&' 공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중이다. 고대에도 우리에게 바다는 중요했고, 해양력은 국가발전에 중요한 요소였다.

◆한성백제의 붕괴

백제는 건국부터 해양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나라이다. 첫째는 국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서'는 '백제'(百濟)라는 국명을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100가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의미라고 기록했다. 해양과 연관이 깊었음을 알려준다.

둘째, 지정학적, 지경학적인 환경 때문이다. 전기의 수도권인 경기만은 한강의 하구와 만나는 해륙적 요충지이다. 벼농사 등 농경의 적지이고, 수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남북 연근해 항로와 중국의 남북 지역과 동시에 연결되는 황해 항로의 결절점이다. 따라서 근초고왕 이후에는 고구려와 충돌하는 전장이었다. 두 나라간의 전략적인 우위는 광개토태왕의 대승으로 변곡점을 맞았다. 이어 427년도에 장수왕이 평양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마침내 백제의 충돌을 벌였다.

475년에 장수왕은 3만의 대군으로 수도인 한성을 공격했다. 개로왕은 왕자인 문주를 신라의 자비왕에게 급파하여 1만명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문주와 신라 구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한성은 함락당했고 개로왕과 왕족들은 처형당했다. 문주는 위례성에서 즉위한 후에 항전을 시도했으나 결국 한 달 여 만에 남쪽의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문주왕은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됐는데, 그 후손들은 일본에서 '백제공'(구다라노 키미)으로 불리면서 존속했다.

◆웅진 시대의 개막

웅진성은 금강 중류가의 현재 공주 공산성이다. '곰나루'(熊津), '고마성'(주서 등), '구마나리'(일본서기) 등이라는 지명에서 보이듯이 금강가에 있는 내륙 항구(河港)도시였다. 하지만 서해로 진출하여 중국 지역과 왜국으로 출항하기에 다소 불편했다. 또한 고구려의 적극적인 공세를 수도권 전선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은 남진하면서 백제성들을 접수하고, 웅진성을 포위했으며, 백제와 동맹을 맺은 신라도 격파했다. 그 무렵에 고구려는 세종시 부강면의 남성골 산성, 대전시 월평동 산성, 음성의 망이 산성 등을 쌓았다.

문주왕은 자구책으로 476년에 아버지인 개로왕처럼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고구려가 해상에서 방해하여 실패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탐라국'으로부터 공물을 받고, 지배자에게 '은솔'이라는 백제의 관직을 주었다. 제주도인 탐라는 해양소국으로서 동아지중해의 물목이었으므로 안정적인 항로를 이용해 일본열도로 편하게 진출하고, 또한 남해 동부의 가야계 세력들을 쉽게 압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주왕은 불과 3년 만에 암살당했다. 한편 그의 동생일 가능성이 높은 곤지는 왜국에서 귀국하여 내신좌평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인 개로왕의 명으로 왜국에 파견됐는데, 현재 오사카만과 가까운 가와치(河內) 지역에 정착해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근처의 모즈 지역을 비롯해서 대규모 고분군들이 많은 지역이다.('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하지만 곤지도 결국 3개월 만에 암살당했다.

이어 삼근왕이 즉위했다. 문주왕의 아들인 그는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대가야가 공격을 해서 전라북도의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섬진강 하구 지역도 탈취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백제 해양력의 심각한 약화를 의미한다. 삼근왕도 결국은 3년 만에 암살당했다. 내부에서 권력쟁탈전이 심각했고, 왕권이 얼마나 허약했는가를 알 수 있다.

◆동성왕의 등장과 국제적인 국가로 발전

이러한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돌파하고, 빠른 시간에 백제를 동아시아 질서의 'pivot' 역할을 하게 한 인물이 등장했다. 문주왕의 조카이지만 곤지의 아들인 24대 임금인 동성왕 모대(牟大)이다. 그는 479년 즉위해서 501년까지 무려 20여 년 동안 재위하면서 백제를 안정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이 무렵 장수왕은 481년에 말갈을 동원하여 신라 국경을 공격했고, 동성왕은 이에 맞서 신라·가야 등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 남부지역 국가들이 총동원돼서 공통의 적인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는 전선이 구축됐다.

동성왕은 국제적인 고립을 타개할 목적으로 484년에 남제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역시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했다. 하지만 토착세력인 사(史)씨의 활약으로 마침내 교섭에 성공했다. 해양력(sea power)과 항로(sea lane) 확보, 즉 해양영토 쟁탈전이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려준다.

이 무렵에 나타난 현상이 이른바 '장강 진출설'이다. 이미 오래 전에 선학들이 주장한 학설이다.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에는 이 시대에 북위(魏虜)가 백제를 쳤으나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동성왕 10년)에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 등을 시켜 격퇴했으며, '남제서'에는 490년에 위나라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했다가 크게 패했다는 내용이 있다. 요서 지역에서 북위군을 격파했는데, 동성왕은 공을 세운 백제의 장군들에게 왕·후·태수 등의 관작을 남제에게 요구했다.

특히 목간나(木干那)라는 인물은 성과 배(舫)를 격파한 공이 있다고 했다. 양국 사이에 대규모의 해전이 일어났고, 백제의 해군력이 강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동성왕이 태수직을 요구한 지역은 광양·광릉·청하 등 중국 해안지역이므로 역사상을 해석하는데 당황스럽게 한다. '주서' 백제전에는 진(晋)나라 이래로 송·제·양나라 시대에는 현재 양자강의 좌에 있었다고 기록됐으며, '북사' 백제전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인 최치원전에는 백제가 전성했을 때에는 강병이 100만이며, 남으로 오(吳) 지역과 월(越) 지역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연(燕)·제(齊)·노(魯)지역을 흔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기록들은 이전 상황을 표현하는 요서진출설과 함께 백제(웅진 시대)가 중국의 북에서 남에 이르는 해안지방에 진출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됐다. 물론 중국의 남북 분단이라는 냉전 상황과 고구려의 영향력, 남조 계통의 사서에만 기록이 된 편향성 등을 고려하면 다 사실로 수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유적과 유물 등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백제가 해양을 무대로 영향력을 끼쳤던 국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다. 중국 지역이 분열되면 우리는 등거리 정책을 추진했고, 중국의 남쪽 국가들은 우리에게 군수물자의 지원을 요청했다. 고구려의 장수왕, 문자명왕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훗날 고려 시대에 요나라 및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남쪽 국가인 송나라가 고려에게 파병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동성왕은 493년에는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삼고, 494년과 495년에는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격퇴하면서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다. 또 498년에는 탐라국이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자 공격하려고군대가 무진주(광주)까지 갔지만, 결국 항복을 받고 중지했다. 이렇게 동성왕은 붕괴위기에 빠진 백제를 안정적인 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도 또한 결국은 암살당했다. 뒤를 이어 25대 무령왕이 등장했다.

◆개방 정책과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킨 무령왕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또는 왜국으로 파견된 왕자 곤지의 아들이다. '일본서기'를 따르면 무령왕은 큐슈 앞 섬인 가카라섬(各羅嶋)에서 낳아서 이름이 '세마키시'(嶋君)였다. 무령왕릉 묘지석에 쓰여진 '사마왕'(斯麻王)과 같이 '섬'을 의미한다. 이 무렵의 백제 역사는 왜국과 깊이 연관됐으므로 왕계가 복잡하다.

그는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일시적으로 회복했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전남 해안을 공격해서 해양 자원을 물론 왜국과 교류하는데 보다 유리한 입지를 차지했다. 또한 대가야 영토를 공격해서 섬진강 유역의 수륙교통로를 확보했다. 또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자제 종족들을 보내서 해당 지역을 통치했다. 이로서 중앙집권적 질서 속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무령왕은 국제 교류를 추진해서 512년, 52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강화했다. 양나라는 단명의 국가였지만, 해양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백제가 항해술, 조선술, 해전술 등을 학습했을 것은 분명하다. 백제는 이때 동맹국인 신라의 사신을 대동했다. 신라는 진흥왕 때 까지는 서해안에 항구가 없었고, 중국어를 아는 사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신라가 자국의 속국이며, 전라도 일대의 반파국 등 소국들 또한 속국인 것처럼 속였다.

백제는 양나라에 보낸 표문에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맺었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할 만큼 성장했다. 국제질서에서도 발언권을 갖게 돼서 521년에는 양나라의 무제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제수 받았다. 물론 이 작호는 동아시아 질서에서 흔한 명목상의 책봉 기록일 뿐이다. 무령왕은 유교를 가르치는 오경박사들을 513년 6월, 516년 9월에 왜국에 보내서 유교를 전해주었다.

1971년 충남 공주시 송산면에서 무령왕의 무덤이 발굴됐다.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에서는 '사마왕'(斯麻王)이라고 새겨진 묘지석과 함께 금으로 제작한 화려한 관식을 비롯해서 금과 은으로 만든 각종 공예품 등 4천6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와 왕비의 시신을 모신 관은 일본 나라의 고야산에서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제작됐다. 그만큼 왜와 연관이 깊었던 증거들이 많다.

◆비운의 증흥군주인 성왕

뒤를 이어 본격적인 중흥 군주인 성(명)왕이 등장했다. 그는 즉위 16년인 538년에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했다. 사비는 금강 하구에 있으며 '구드래'라는 내항을 갖춘 강해도시이다. 왜국 뿐 만 아니라 중국 지역과 외교가 더 쉽다. 또한 전선과 멀리 떨어져있어 수도의 안정성도 확보됐다. 충청남도와 전라도의 서해안은 곡창지대였고, 수산업이 발달했다. 그는 관료체제는 물론이고, 수도와 지방국가 체제를 정비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기술과 산업의 발달, 무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또한 불교는 물론이고 유교 또한 발전키켜서 국가체제를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왜국에도 전수해서 그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북사' 고려전에는 "백제에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이 함께 산다. 중국인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왜국과 가까우며 문신한 자가 많다…언어가 중국과 비슷하다. 진한의 남은 습속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수서'에도 백제에 "왜와 중국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성왕은 '나제동맹'을 맺어 한강 유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실패했고, 이를 응징하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백제는 다시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해양력을 강화시킨 '농해(農海)국가'로서 강국으로 발돋음하였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