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대장동 일당 편에서 수사 방향을 틀었다. 검찰은 권력 편에서 대장동 일당 항소를 포기했다. 이 덕에 기자 출신 김만배 일당은 성남 시민 몫 7천8백억원(검찰 공소 )을 챙겼다. 단군 이래 최대 부동산 비리 재벌이 됐다. 14일 자 갤럽 여론 조사를 보면 국민 48%가 대장동 일당에 대한 항소 포기가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적절은 24%에 그쳤다. 송나라 포청천의 맑은 하늘에 날벼락(靑天霹靂, 청천벽력) 같은 엄정 법 집행 역사를 들춰본다.
◆TV 드라마 판관 포청천
31년 전 이맘때. 케이블 TV도 넷플릭스 OTT도 없던 시절. 필자가 다니던 SBS, KBS, MBC 지상파 TV 3사 황금시대. 1994년 10월 KBS 2TV에서 매주 금요일 밤 「포청천(包青天)」 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3년 대만 CTS가 제작한 역사극이 야간 문화 풍토를 바꿔 조기 귀가 붐을 이룰 정도였다.
검은 얼굴에 초승달 문양을 새긴 포청천(대만 배우 金超群, Jin Chao-chun)이 단호하고 결연한 법 집행으로 삼형(三刑,용·호랑이·개) 단죄 장치에서 범죄자를 가을 서리(秋霜, 추상)같이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징치(懲治)할 때마다 시청자들은 부패한 사회에서 느끼던 울분을 정화(淨化, Catharsis)할 수 있었다. 주제음악 "開封有個包青天(개봉에는 포청천이 있다)"는 중화권을 넘어 한국 저잣거리에서도 심심찮게 들릴 정도였다.
◆중국 역사고도 개봉부(開封府) 유적
TV 인기 드라마 속 엄정한 법의 집행자 포청천의 잔영을 가슴에 담고 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으로 가보자. 시내 중심 인공호수 포공호(包公湖)에 개봉부(開封府) 청사(서울로 치면 서울시 청사) 유적이 복원돼 있다. 하남성은 중국 문명의 요람 황하(黃河)의 핵심 지역이고 은나라라고 부르는 상(商)나라 유적 은허(殷墟)를 비롯해 중국 고대 유적이 다수 남은 지역이다. 개봉은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장안)이나 낙양(洛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중국의 여러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역사 고도다.
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삼국지의 무대 삼국 가운데 조조가 세운 위(魏) 나라가 낙양과 함께 번갈아 수도로 삼던 곳이다. 남북조 시대 선비족의 북위(北魏)는 물론 동위(東魏), 북제(北齊)도 일시 수도로 삼았다. 당나라가 무너진 907년 이후 '5대 십국 시대' 후량(後梁, 907–923)을 비롯한 주요 왕조가 모두 개봉을 수도로 썼다. 무엇보다 5대 십국의 혼돈을 정리하고 들어선 문치의 송(宋, 960–1127, 북송)나라 수도였다.
◆개봉부(開封府) 세계 최초 지폐 사용 교역 도시
개봉은 중세 10~11세기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동서양 융합 국제 대도시였다. 인구는 150만 명을 넘었고, 상업과 교역이 발달해 24시간 야시(夜市)도 활성화된 불야성(不夜城)이었다.
1020년대 세계 최초로 종이 화폐 교자(交子)를 사용한 것은 번영하던 송나라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1127년 여진족 금나라가 침략해 개봉을 철저하게 파괴하면서(정강의 변) 화려하던 황궁과 유적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복원한 개봉부 유적은 황제가 살던 황궁은 아니고, 개봉이라는 수도 행정을 담당하던 일종의 시청 관아다.
◆포청천 기념 유적 포공사
개봉부 복원 유적에서 아름다운 포공 호수 물가를 끼고 돌며 15분여 천천히 걸으면 포공사(包公祠)에 이른다. 포청천(包公)을 기념하는 사당이다. 포청천이 사망 직후 작은 제단이 만들어졌고, 14세기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홍무제 때 사당으로 번듯한 모습을 갖췄으니 우리로 치면 고려말의 역사 유적인 셈이다. 중국 역사에서 충절의 상징은 삼국시대 관우다. 관우를 기리는 유적의 상징은 낙양에 자리한 관림(關林, 관우의 묘이자 사당)이다.
이에 반해 정의(正義)와 청렴(淸廉)의 상징은 포청천이고, 대표 장소는 개봉의 포청천 사당 포공사다. 서양과 달리 시각예술이 발달하지 못한 동양 문화에서 포청천의 초상화나 조각이 남아 있지 못한 아쉬움을 새물내 물씬 풍기는 현대 조각과 비석 음각화로 보며 중국 문명 최고의 엄정한 법집행자 포청천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효심지극 포청천, 수도 개봉 사법행정 책임자 취임
포청천은 새천년을 앞둔 999년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에서 태어났다. 성 포(包), 이름 정(拯)이지만, 포공(包公)으로 부른다. 문학 작품에서는 푸른 하늘(靑天)에 날벼락 같은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해 포청천(包青天)으로 상징화한다. 벼슬길 진입은 늦었다.
몽골 원(元)나라 순제(順帝, 고려여인 기황후를 총애한 혜종) 때 1345년 총재관 탈탈(脫脫, Tuotuo)이 완성한 총 496권 분량의 방대한 기전체(紀傳體) 송나라 역사책 『송사(宋史)』의 「포정전(包拯傳)」을 보자. 1034년 진사에 급제해 첫관직이 제수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한직에 실망해서?
아니다. "以母老,不就職(어머니가 노쇠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음)". 지극한 효심이었음을 『宋史』는 전한다. 1044년 45살에 "及母終,始任監察御史(어머니가 사망한 뒤, 감찰어사)"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는다. 『宋史』를 보면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며 유능한 관리로 "所至有聲(가는 곳마다 명성)"을 내다 1047~1050년 사이 송나라 인종 때 수도 개봉의 행정사법 책임자 개봉부윤(開封府尹)에 부임한다.
◆귀족, 황족도 벌벌 떠는 추상같은 법집행
후대 원·명·청 시대 『포공안(包公案)』, 『삼협오의(三俠五義)』 같은 소설이나 희곡, 야사에서는 포청천이 황제의 친척마저 사형에 처했다고 나온다. 실제 그랬을까? 정사 『宋史』를 보면 "拯持法平允,不避權勢"(법 집행이 공평하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拯為開封府,貴戚多憚之(개봉부윤이 되었을 때 귀족과 황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貴戚、權豪皆畏憚之(귀족·권세가가 모두 두려워한다)"고 묘사한다.
귀척(貴戚)의 ①貴(귀)는 권문세가, ②척(戚)은 황족(皇族)과 황제의 외척이다. 비록 야사에서처럼 황족을 사형시키지는 않았다고 해도 서슬 퍼런 황족마저도 포청천의 엄격한 법 집행에 예외가 아니었음을 정사가 입증한다. 『宋史』는 포청천의 사법행정으로 "京師素稱難治,拯至,一清如水"(다스리기 어려웠던 수도가 그가 오자 맑은 물처럼 깨끗해짐)"이라고 극찬한다.
◆부패한 탐관오리, 부정한 민간업자 단죄
황족마저 벌벌 떨게 만드는 포청천이 '부패 공무원·부정 업자' 관련 부패 사건을 엄격히 다스렸음은 물어보나 마나다(不問可知, 불문가지). 백성을 해친 귀족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劾之不貸(용서하지 않고 탄핵한니)", "吏畏其嚴(관리들이 그의 엄함을 두려워했다)". 부패 관리의 곡물 재고 조작 부정에 대해서는? "治漕運訟事,多所平反(운송·조달 및 곡물 관련 사건을 바로잡았다)". 그래서 "吏不敢欺(아전들이 감히 속일 수 없었다)". 이밖에도 '冤獄(원통한 사건)' 과 '滯訟(묵은 재판)' 해결, '平反(잘못된 판결 바로잡기)'를 통해 "嚴刑以懲惡(악을 징벌하고 엄정하게 집행)하니, "民以拯爲神明(백성들은 그를 신명처럼 여겼다)"고 『宋史』는 전한다.
◆가족 굶주림의 포청천이 한국사회에 던져주는 의미
백성들이 신의 반열로 올렸던 포청천은 1062년 63세로 사망한다. 『宋史』는 "剛直無私(강직하고 사사로움이 없었고)", "拯在官,不受饋遺(어떠한 선물·뇌물도 받지 않았으며)", "家無餘財(집에 여분의 재산이 없었던)" 그의 죽음에 "朝廷震悼(조정이 크게 슬퍼하며)" 예부시랑(禮部侍郎)을 추증했다고 기록한다. 청사(靑史, 푸른 죽간에 적은 역사 기록)는 포청천으로 송나라 수도 개봉이 깨끗해졌다고 적었다. 청사는 성남 대장동에서부터 한국이 더러워졌다고 적을까?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