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주소 이야기
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 민음사 펴냄
1997년 도널드 드럼프는 뉴욕 맨해튼 북서쪽 어퍼 웨스트사이드의 콜럼버스 서클 인근에 신축 건물을 짓고는, 건물 주소를 뉴욕시에서 지정한 주소인 콜럼버스 서클 15번지에서 '센트럴파크 웨스트 1번지'로 바꾸어줄 것을 시에 요구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뉴욕에서는 주소도 팔고 살 수 있다(2019년 기준 1만 1000달러).
"지난 몇 년간 뉴욕 시의회에서 통과된 조례의 40퍼센트 이상이 도로명 변경에 관한 것이었다."고 시작하는 흥미로운 책 '주소 이야기'는 부제에 적힌 대로,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에 관한 탐색기이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계기, 즉 도로명 주소에 관해 흥미를 갖게 된 건 전 세계 대부분의 가구에 도로명 주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였다. 주소 붙여주기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빈곤 구제방법인데 주소가 신용거래와 투표권 행사를 용이하게 하고 세계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소가 빈민촌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알려주는 사례로 인도 콜카타를 언급하는 대목은 적절하다. 제대로 된 지도가 없는 아이티를 언급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하는 곳은 지도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환자의 주소를 적게 했는데 '망고나무에서 한 블록 아래'라고 적은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라고.
프랑스대혁명 직후 일부 거리에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빅토리아 톰슨이 말한 대로 파리는 도시 경관 자체가 "혁명에 관한 교리 문답서"가 될 터였다. 파리는 혁명가가 꿈꾼 새로운 도시가 되진 못했을지언정 프랑스혁명은 도로명 개정을 통해 새로운 이념을 과시하는 유행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전 세계 혁명 정부들이 집권과 동시에 거리 이름을 바꿨다. 멕시코에는 에밀리아노 사파타 이름을 딴 거리가 500여 개에 이르고 러시아에는 레닌 이름의 도로가 4000개가 넘는다. 중국은 거리 이름을 소수민족 지역을 감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저자는 근대 초기 유럽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는 '식별 가능한' 사회가 필수적이었고 시민들은 기록할 수 있는 이름과 주소가 있어야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집집마다 번호를 매기는 일은 거대한 근대국가 사업의 일환이었다. 번지의 역사에 관한 최고 전문가 안톤 탄트너에 따르면 "번지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쉽게 사람들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도로명 주소와 번지 주소의 차이를 설명하는 장에 등장하는 한국과 일본의 주소 체계. 서양인들은 도로에 집착하고 도로에 이름 붙이는 관행을 고집해온 반면 일본에선 오히려 지역, 즉 블록에 더 주목한다. 일본에 영향을 받은 한국 역시 2011년에 도로명 주소를 사용했으나 반발이 심했다면서 한국인들도 도시를 구획으로 읽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인다.
주소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다. 주소를 통해 사람의 신원을 확인한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 투표할 때, 직업을 얻을 때, 은행 계좌를 만들 때 주소를 요구한다. "주소는 은행 직원이 우리 집을 방문할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현대 사회에서 나의 주소는 곧 나다."(385쪽)
내가 40년 넘게 살던 서교동 집은 월드컵북로5길이라는 도로명 주소를 부여받았다. 서교동 자가가 평생의 자부심이던 내 아버지가 이 사실을 생전에 알았다면….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