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55> 14년 만에 뚫은 달구벌대로

입력 2025-12-0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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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26일 대구 대동·대서로(현 달구벌대로) 분기점인 반월당 네거리가 확·포장 공사를 끝내고 말끔히 단장 됐다. 달구벌대로는 1965년
1979년 12월 26일 대구 대동·대서로(현 달구벌대로) 분기점인 반월당 네거리가 확·포장 공사를 끝내고 말끔히 단장 됐다. 달구벌대로는 1965년 '대대구 건설' 일환으로 폭 50m 규모의 동서관통로 건설을 계획한 지 14년 만에 완성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8년 12월 대구 서구 감삼동 일대 들판. 동서관통로 건설 공사 3년째 임에도 예산 부족으로 감삼동 일대는 구 도로 모습 그대로다. 사진 아래는 1966년 5월 23일 착공해 준공을 앞둔 감삼정수장(옛 두류정수장)으로 현재 대구 신청사 예정지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8년 12월 대구 서구 감삼동 일대 들판. 동서관통로 건설 공사 3년째 임에도 예산 부족으로 감삼동 일대는 구 도로 모습 그대로다. 사진 아래는 1966년 5월 23일 착공해 준공을 앞둔 감삼정수장(옛 두류정수장)으로 현재 대구 신청사 예정지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폭 50m 규모의 동서관통로(현 달구벌대로) 건설 계획에 따라 1970년대 초 대구 내당교회 부근 2차선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도로 부지에 편입된 주택이 철거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폭 50m 규모의 동서관통로(현 달구벌대로) 건설 계획에 따라 1970년대 초 대구 내당교회 부근 2차선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도로 부지에 편입된 주택이 철거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1월 5일 대구 내당동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확장 공사장에서 아이들이 흙더미를 놀이터 삼아 놀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1월 5일 대구 내당동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확장 공사장에서 아이들이 흙더미를 놀이터 삼아 놀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1월 대구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확장공사 현장에 놓인 콘크리트 하수관. 멀리 대구 서현교회 건물이 보인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1월 대구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확장공사 현장에 놓인 콘크리트 하수관. 멀리 대구 서현교회 건물이 보인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1월 대구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확장 공사장에서 한 인부가 해머로 암반을 깨고 있다. 멀리 서현교회 건물이 보인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1월 대구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확장 공사장에서 한 인부가 해머로 암반을 깨고 있다. 멀리 서현교회 건물이 보인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2월 26일 대구 동서관통로(구 대동·대서로, 현 달구벌대로) 시작점인 반월당. 마침내 도로가 말끔히 포장됐습니다. 확장된 도로는 중앙에 화단까지 갖추고, 직경이 100m에 달하는 반월당네거리는 광장을 방불케 합니다. 1965년 폭 50m, 총 연장 10km의 동서관통로를 계획한 지 어언 14년.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실로 지난한 세월이었습니다.

인구 80만에 자동차도 뜸하던 그때(1965년), 허허벌판 감삼동에서 도심을 지나 신천만 건너면 또 논밭이 아득한 만촌동까지, 당시 제일 넓다는 중앙로(약 22m)보다 폭이 두 배도 넘는 큰 도로를 설계한 이유는 뭘까.

1965년 2월 2일 건설부는 대구시 도시재정비계획을 고시, 10일부터 시행토록 했습니다. 장차 대구 인구가 늘 것에 대비해 중구 일원에 몰린 도심을 동서남북 외곽으로 확장하는 이른바 '대(大)대구 건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건설안에 따르면 칠성·침산동에 집중된 공업지대(제1공업단지)를 평리·검단·비산동을 넘어 성서·월배까지 확장키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성서 들판을 제2공업단지로 지정하고 이곳까지 새로 큰 도로를 뚫기로 했습니다. 당시 대구 주요 도로는 중앙로를 간선(幹線)으로 하는 남북관통로가 고작. 도시 확장을 위해선 동서관통로가 필수조건이었습니다.

반월당을 기점으로 수성교~범어동~만촌동 구간은 B-1광로(廣路), 반월당~내당동~감삼동 구간은 B-2광로로 명명한 동서관통로. 공사는 제2공업단지가 들어서는 서쪽 B-2광로부터 시작됐습니다.

1966년 3월 현재 도로 부지 매입은 겨우 30% 선. 사들여야 할 부지가 워낙 방대해 계산오거리, 내당주차장(현 대구서부교회 자리) 일대 등 땅값이 비싼 곳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한옥 등 건물 354동이 자리한 삼덕파출소(현 남산지구대)~신남네거리 500m 구간은 80% 이상 보상을 마쳤다고 강제 철거하는 바람에 어느 초가집은 세간살이가 뒤죽박죽 날벼락을 맞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는 두 차례 선거(5월 제6대 대선, 6월 제7대 총선)로 선심성 예산을 늘인 탓에 도로공사는 손도 못 댔습니다.

1969년 3월, 착공 4년이 지나도 동서관통로 소통은 감감 무소식. '대대구 안'을 짠 강계원 시장 후임으로 부임한 태종학 시장(재임 1966년 5월~1969년 10월)은 성서에 예정된 제2공업단지 입지가 나쁘다며 제3공업단지를 먼저 조성하는 바람에 동서관통로 건설에 힘이 빠진 탓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자금난. 당초부터 충분한 재원 확보 없이 얼마간의 국비로 시작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1973년 무렵엔 치솟은 용지 보상비에 반월당~계산오거리 구간(당시 폭 25m)을 확장하지 못해 발을 굴렀습니다. 반월당~경산 구간(B-2광로)은 확장을 하고도 포장을 못해 비만 오면 질퍽이는 구간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공사는 여기 찔끔 저기 찔끔, 해가 가도 진척이 없었습니다. 국비 보조가 시원찮은 데다 시민 살림살이마저 팍팍해 시 재정만으론 감당이 역부족. 1975년 시 당국은 궁리 끝에 시유지(공설시장)인 서문시장을 5지구까지 잇따라 민간에 매각해 그 자금으로 겨우 건설비를 충당했습니다.

1965년 착공, 1979년 12월 말 완공. 한때 대동·대서로로 불리던 달구벌대로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쓸데없이 큰 도로를 낸다고 말이 많았지만, 도로는 설계 당시 초심 그대로 실현돼 지금은 전국에서 부러워하는 대구의 대동맥이 됐습니다. 대구의 미래를 헤아린 리더의 혜안을 돌아보게 하는 오늘입니다.

대구 신청사, 대구경북 신공항이 수년째 자금난으로 표류 중입니다. 지도자는 힘들고 어려울 때 앞장서 길을 여는 등대 같은 존재. 오로지 지역의 백년대계를 생각하고 또 생각할 일입니다. 14년 만에 기어이 뚫은 달구벌대로가 주는 교훈입니다.

1979년 10월 22일 확·포장 공사가 한창인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계산오거리 모습. 왼쪽 큰 건물은 서현교회 건물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0월 22일 확·포장 공사가 한창인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계산오거리 모습. 왼쪽 큰 건물은 서현교회 건물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0월 22일 대동로(현 달구벌대로) 봉산육거리~반월당 구간에 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0월 22일 대동로(현 달구벌대로) 봉산육거리~반월당 구간에 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0월 22일 대구 대동·대서로(현 달구벌대로) 분기점인 반월당네거리 넓게 확장된 가운데 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0월 22일 대구 대동·대서로(현 달구벌대로) 분기점인 반월당네거리 넓게 확장된 가운데 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5년 대구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반월당네거리~계산오거리 구간 확장 전 모습(위)과 1979년 12월 26일 폭 50m로 확·포장 공사가 끝난 후 모습(아래). 도로변 오른쪽 3층 건물은 고려예식장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5년 대구 대서로(현 달구벌대로) 반월당네거리~계산오거리 구간 확장 전 모습(위)과 1979년 12월 26일 폭 50m로 확·포장 공사가 끝난 후 모습(아래). 도로변 오른쪽 3층 건물은 고려예식장이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2월, 확장된 대동로(현 달구벌대로)와 동대구로가 교차하는 범어네거리 전경. 매일아카이빙센터
1979년 12월, 확장된 대동로(현 달구벌대로)와 동대구로가 교차하는 범어네거리 전경. 매일아카이빙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