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극원] 리멤버 박정희 대통령

입력 2025-11-13 18:05:53 수정 2025-11-13 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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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를 이끈 지도자에 대해 공(功)을 먼저 논하고 과(過)는 그 다음에 논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부국의 나라'를 세운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평가는 그의 공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과를 과도하게 부풀린 경향이 있다.

이제는 역사의 균형을 바로 세워야 한다. 11월 14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탄신일이다.

그는 1917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성빈은 종9품 무관으로 성주에서 구미로 이주해 당시 경상도 관찰사 장승원의 소작농으로 살았다.

장승원은 1917년 대한광복군 경북지부장 채기중 등에 의해 처단되었고 어린 박정희는 가난과 혼란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다" "지도자는 국민에게 꿈을 파는 상인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한 지도자였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에게 희망을 팔며 국가의 미래를 설계했다.

그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전에 국군을 파병해 10억달러의 봉급과 35억달러 이상의 차관을 미국으로부터 확보했다. 이 외화는 경제개발계획의 초석이 됐고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로 얻은 6억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외화 확보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한 그의 선견지명은 산업화의 토대를 닦았다. 물론 그 배경에는 4천960명의 젊은이들이 바친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64년 독일 국빈 방문에서 그는 루르 지방 함보른 탄광을 찾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다. "우리 생전에는 가난을 못 벗더라도 후손을 위해 일합시다. 우리 후손만은 타국에 팔려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란 그의 이 한마디에 현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를 보고받은 에르하르트 독일 총리는 감동해 2억5천만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고 철강산업과 고속도로 건설을 조언했다. 이 조언은 훗날 경부고속도로의 밑거름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야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단했다. 당시 국가 예산이 1천600억원이었지만 그중 400억원을 투입해 서울과 부산을 잇는 428㎞의 국토 대동맥을 완성했다.

이는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산업화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길이었다. 미군 장비를 무상으로 빌려 쓰기 위해 통행료 면제 조건을 내거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목표를 이뤘다.

또한 1965년 미국 육군사관학교 강연에서 "폭력만으로 인류를 개혁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공산주의자입니다"라며 자유의 가치를 역설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방문 기념으로 사면권을 제안받자 "벌을 받고 있는 생도 전원을 사면하겠다"고 말해 생도들의 존경을 받았다.

1967년 소양강댐 건설 때는 삼성의 이병철, 현대의 정주영에게 입찰 준비를 지시했다. 이병철은 해외 기술진을 구해 왔고 정주영은 자금을 마련했다. 낙찰은 삼성이 받았지만 완공 후 정주영은 강남 개발에 나서 서울의 새 지도를 그렸다. 오늘의 강남이 그 결실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은 준비된 영웅이 시대를 이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에게 그런 영웅으로 존재한다. 절망 속에서도 미래를 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그의 진정한 유산은 경제 성장만이 아니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국민의 자신감이었다. 그 자신감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