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멈춘 새벽, 시작도 못 한 하루…국민 분노 치솟는다

입력 2025-11-04 09:44:29 수정 2025-11-04 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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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배송 중단 요구에 현장 기사·소비자 93% "안 된다"

맞벌이 부부인 김씨에게 이른 아침의 배송은 단순한 편의가 아닌
맞벌이 부부인 김씨에게 이른 아침의 배송은 단순한 편의가 아닌 '생존 도구'다. "이게 없으면 아이가 밥을 못 먹고, 울음을 터뜨리고, 결국 회사에 늦게 가게 됩니다. 하루가 망가지는 거죠"라고 말했다. 매일신문 자료사진

한겨울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동탄 신도시를 스친 4일 새벽 5시 50분.

한 아파트 복도에 놓인 재활용이 가능한 상자 안에는 기저귀 한 팩, 멸균 우유 두 개, 계란 한 판이 담겨 있었다. 모두 잠든 시각, 이른 출근을 앞둔 김모(37) 씨는 이 봉투를 집 안으로 들이밀며 "다행히 오늘도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맞벌이 부부인 김씨에게 이른 아침의 배송은 단순한 편의가 아닌 '생존 도구'다. "이게 없으면 아이가 밥을 못 먹고, 울음을 터뜨리고, 결국 회사에 늦게 가게 됩니다. 하루가 망가지는 거죠."

그러나 이 평범한 일상이 흔들리고 있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택배노조가 '심야배송 금지'를 공식 요구하면서, 배송업계와 소비자 사이에 거센 갈등이 번지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배송을 전면 중단하자는 것으로, 업계에서는 이를 '심야배송 폐지'로 해석하고 있다.

◆ "일을 하지 말라니요"…현장은 '정반대' 목소리

택배노조는 심야배송이 택배기사의 과로사를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밤 시간 노동이 건강을 해친다는 점을 들어 자정을 기점으로 한 배송 중단을 강하게 주장해왔다.

하지만 정작 현장 기사들의 반응은 다르다.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가 2025년 10월 자사 택배기사 1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3%가 "심야배송 금지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반대 이유로는 수입 감소, 근무 유연성 저하, 고객 신뢰 상실 등이 복합적으로 언급됐다.

현장에서 6년째 일하고 있는 박모(42) 씨는 "야간 근무를 선택한 건 우리"라며 "이 시간대에 일해야 아이 등하원이나 부모 병원 진료를 챙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노조는 우리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현장과 괴리가 크다"고 말했다.

주간 근무로 전환할 경우, 기사 2명 중 1명은 이직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CJ대한통운 소속 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익명 설문조사에서도 주간 전환 시 '50% 이상 이직할 의사 있음'이라는 답변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 심야배송은 편의 아닌 생계…"6.8조 시장 무너진다"

심야배송은 단순한 편의 서비스가 아니다. 한국유통학회가 발표한 2024년 자료에 따르면, 국내 새벽배송 시장 규모는 약 6조8000억 원에 달한다. 해당 생태계에는 38만 명의 중소상공인과 2만1000여 농가, 10만3000개의 직접 일자리가 얽혀 있다.

서울 마포구에서 제과점을 운영 중인 이재훈(52) 사장은 "새벽 4시에 밀가루와 버터가 도착하지 않으면 빵 300개를 못 굽는다"며 "문 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생재료는 오전 6시 전에 와야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몇 시간만 늦어도 매출이 반토막 난다"고 토로했다.

충남 논산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최모(48) 씨는 "딸기는 당일 판매가 생명인데, 새벽배송이 없으면 하루 30%는 폐기"라며 "쿠팡 통해 연매출 1억 원을 찍었는데, 이게 사라지면 농장 운영이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새벽배송이 중단될 경우 1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물류연구원의 시뮬레이션 자료에 따르면, 관련 종사자 대부분이 소득 단절을 겪게 되고, 일부 영세 자영업자는 폐업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 "과로사는 시스템의 문제"…이미 자동화가 답을 제시했다

노조가 강조하는 과로사 문제는 '심야 근무' 때문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고용노동부가 2023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택배 노동자 과로의 주요 원인은 '분류 작업'으로 전체의 68%를 차지했다. 반면 운전 업무로 인한 과로사 비중은 12%에 불과했다.

쿠팡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2024년까지 물류센터의 분류 작업을 87%까지 자동화했다. 그 결과 산업재해 사고율이 41%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쿠팡 기사들은 "이제는 차만 운전하면 된다"며 업무 환경이 크게 개선됐다고 증언했다.

유럽 선진국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새벽배송을 유지하면서도, 인공지능 기반의 물류 로봇을 도입해 분류 작업을 전면 자동화했다. 이들 국가는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율이 한국의 1/5 수준에 불과하다.

한 물류학과 교수는 "시간대를 제한하는 방식은 현장의 현실을 무시한 행정적 발상"이라며 "이미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인위적 제한으로 막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 소비자는 분명하다…"새벽배송은 멈추면 안 된다"

소비자들의 반응도 분명하다. 한국소비자원이 실시한 설문조사(2025년 9월)에 따르면, 응답자의 64.1%가 '심야배송이 중단될 경우 큰 불편을 겪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 언론사가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 99%가 '새벽배송을 다시 이용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맘카페, 직장인 커뮤니티, SNS 등에서도 '새벽배송을 살리자'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11월 3일 기준 X(구 트위터)에서 #새벽배송살리자 해시태그는 48만 건을 돌파했다. 다수의 워킹맘, 청년 1인 가구, 자영업자들이 "이 서비스 없으면 생계가 흔들린다"며 정부와 정치권의 개입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 논란의 중심, 정치권…"노동 아닌 표 계산의 산물"

이번 논란을 두고 일각에서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심야배송을 둘러싼 논의는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택배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시작됐으며, 일부 민주당 내 강경 친노조 세력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이건 민노총의 청구서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정의당 장혜영 전 의원은 "과로사를 방치한 쿠팡의 탐욕이 문제"라고 맞섰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정치적 진영과는 무관하게, 실용성과 생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 "금지 아닌 진화"…해결책은 있다

전문가들은 심야배송의 전면 금지가 아닌 '선택적 참여'와 '기술 혁신'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야간 배송을 희망하는 기사에게만 업무를 배정하고, 주간 전환을 원하는 기사에게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분류 자동화율이 낮은 중소 물류기업에 정부가 기술 도입을 지원해 '쿠팡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국토교통부와 고용노동부가 주도하는 3자 협의체를 통해 노조·기업·정부가 함께 대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 "아침을 멈추지 말라"…심야배송은 '선택'이 아닌 '필수'

새벽 5시 50분,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종이봉투. 기저귀와 우유, 계란이 담긴 그 속엔 단순한 물품만이 아닌 2000만 명의 하루가 들어 있다. 새벽배송은 단지 빠른 배송이 아닌, 대한민국의 아침이자 수많은 가족의 생계와 일상이다.

심야배송 금지는 이들의 일상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현장의 노동자가 원치 않고, 소비자가 거부하며, 자영업자와 농민이 고사 위기에 처하는 정책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결정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편의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심야배송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됐다. 이를 멈추는 순간, 수많은 집 앞에 놓인 재활용이 가능한 상자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삶도 함께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