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단절된 곳에서 의도된 고립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강원도 정선엔 그런 산골짜기가 하나 있다. 강원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덕산기 계곡이다. 고요한 숲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책방이 있고, 숲속에서 하룻밤 조용히 묵을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연과 나를 마주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불편한 삶 택한 주민들
'은둔의 땅' '한국의 네팔'이라고도 불리는 덕산기 계곡은 정선읍 덕우리에서 화암면 북동리를 잇는 약 12㎞의 물길이다. 주변으론 '뼝대'(벼랑을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라고 불리는, 웅장하게 솟은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굽이굽이 휘돌아나가는 옥빛 계곡물과 진초록으로 빛나는 곳곳의 소(沼)가 빚어낸 절경이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졌다.
이곳에 사람이 몰리는 건 주로 여름 피서철이다. 보석 같은 물색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렇다. 계곡은 건천이라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을 제외하면 말라붙은 자갈바닥을 허옇게 드러낸다.
고즈넉한 숲도 이곳의 자랑거리다. 울창한 낙엽송 지대와 너럭바위 사이를 넘나들며 걷기만 해도 수려한 경관에 가슴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특히나 가을엔 사람이 없어서 좋다.
찻길이 없던 계곡에 포장도로가 생기면서 예전의 정취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 상류의 약 1.5㎞ 구간은 비포장 옛길이 그대로 남았다. 이 계곡을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싶은 덕산기마을 주민들이 군청과 지역의 개발 논리와 싸워 이긴 결과라고 한다. 옛 모습을 간직한 덕산기마을 상류엔 네 가구가 스스로 선택한 '불편한 삶'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자연과 옛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덕산기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진 '덕산터'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이미 많은 이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덕산터 게스트하우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차를 세우고 호젓한 숲길 1.5㎞를 걸어 들어가,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산장에서 오지 생활을 체험하기 위한 일정이다.
지난 18일 덕산터 게스트하우스로 가기 위해 덕산기 마을로 향했다. 추석 연휴 때부터 거의 매일 내리던 비가 이날도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계곡물이 불어나있을 것을 대비해 샌들을 챙겼지만, 예상보다 많은 비에 게스트하우스까지 접근이 안 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대구에서 승용차로 4시간을 달려 정선읍에 도착할 즈음 게스트하우스 주인 최일순(58)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계곡물이 불어나 걸어서 오는 건 위험하니 픽업하러 내려갈 테니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라는 얘기였다.
덕산터 게스트하우스는 덕산기 마을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사륜구동 차가 아니라면 마을 초입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차를 세워두고 두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물길을 따라 난 길은 온통 자갈밭인데다 계곡을 가로질러야 할 구간도 4곳이나 되기 때문이다.
계곡 들머리에 도착해보니 최 씨의 말처럼 계곡물은 무섭게 불어나 있었다. 이내 도로가 잠긴 구간이 나타났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니 이곳은 차량을 세워두려고 계획한 곳보다 2㎞ 하류 지점. 덕산기를 걸으며 계곡의 속살을 느껴보겠다는 계획은 그렇게 무산됐다.
최일순 씨를 만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한 다른 일행들과 함께 1톤 트럭을 얻어 타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물에 잠긴 구간이 수없이 나왔다. 어떤 곳은 운전석 바닥을 적실 정도로 물이 불어나 있었다. 길이 잠긴 구간을 12곳쯤 지났을 무렵 최 씨가 한 마디 던진다. "저기가 저희 집입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언덕 위 황토색 게스트하우스 덕산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숨겨진 집이라니. 설렘과 호기심이 일렁였다. 그리고 계곡물을 한 번 더 가로질러 드디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고립된 산장에서 보낸 하룻밤
덕산터는 덕산기의 옛이름이다. 이름답게 강원도의 전통 농가 주택을 원형 그대로 살려 숙박을 제공한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데우는 온돌방은 작고 아늑하다. 게스트하우스 건물 한쪽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소박한 정자와 작은 폭포도 있다.
산장 주변을 둘러보던 다른 일행들이 휴대전화 안테나가 사라졌다고 웅성인다. 이곳에선 딱 한 개 통신사만 전화가 터진다고 최일순 씨가 설명했다. 그리곤 한 마디 덧붙인다. "비가 그쳤다고 방금 차가 지나온 계곡을 건널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물살이 세고 허벅지까지 물이 불어 위험합니다." 낭만적으로만 생각했던 '고립'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변 풍경에 눈을 돌렸다. 온통 풀과 나무로 둘러싸인 정자에 앉으니 마치 자연의 품안에 안긴 듯 포근함이 밀려왔다. 눈앞엔 정겨운 농가의 풍경이 펼쳐지고 이따금씩 풀벌레 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아늑함을 더한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물매화도 눈에 띄었다.
어느새 푸르스름한 땅거미가 산속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주인 최일순 씨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연극배우이자 오지여행가였다. 20대 때부터 100개국 가까이 돌아다녔다. 2000년 무렵 이곳에 들어와 집을 꾸미고 가끔 지인들을 초대하며 별장처럼 머물렀다. 5~6년 전부터는 완전히 정착해 본격적으로 게스트하우스 영업을 하고 있다. 가끔씩 손수 만든 산장 옆 야외 무대에서 공연도 한다. 올해 5월엔 동료 배우들과 '아버지는 광부였다'란 공연을 했다. 그는 지금도 매년 겨울이면 산장 문을 닫고 3개월 가량 오지를 떠돈다고 한다.
그렇게 실컷 인생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에 푹 안긴 산골의 밤이 깊었다. 산장 주변엔 계곡 물소리와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요란했다.
◆오지 계곡에 책방이 있었네
이튿날이 눈을 뜨자마자 계곡물부터 확인했다. 물이 꽤 줄어 조심해서 내려가면 걸어서 갈 만하겠다는 최일순 씨의 말에 아침식사를 한 뒤 곧장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비 갠 계곡은 맑은 햇살과 숲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풍경을 선사했다. 만약 트럭을 타고 내려갔다면 느껴볼 수 없었을 소중한 풍경이었다.
700m쯤 계곡을 거슬러 내려오니 '숲속책방'이라고 쓴 나무 간판이 보였다. 책방 개 '동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먼저 뛰쳐나와 짖었다.
숲속책방은 소설가 고 강기희 씨와 동화작가 유진아 씨 부부가 운영하던 공간이다. 덕산기는 강기희 씨의 선대가 뿌리내리고 살던 고향으로, 2017년 이곳으로 와 소장하던 책 1만권을 수납하려고 지은 창고가 그대로 책방이 됐다고 한다. 지난 2023년 강 씨가 세상을 떠나며 유진아 씨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가엔 두 사람의 작품을 포함한 문학작품부터 인문학 서적까지 빼곡하다.
강기희 씨의 시집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를 사서 책방 마당 한쪽 '의풍정(義風亭)' 현판을 단 정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시집엔 덕산기의 사계절을 노래한 시가 담겨 있었다.
"…그대 덕산기에 오시려거든/ 물매화가 꽃대를 밀어올리기 시작할 무렵/ 빈마음으로 오시라/ 혹여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분기해 있다면/ 애기단풍 붉고 쪽동백 노랗게 물드는 시월/ 마음 또한 노랗고 붉어지러 오시라"(강기희, '덕산기에 오시려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