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황금 들녘을 가로질러 뺨을 스치는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다.느릿느릿 넘어가던 햇살은 숨이 넘어갈 듯 서산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이지만 트랙터는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들녘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한여름 뜨거운 햇살을 담은 잘 영근 '나락'을 수확한다.
기억 하나가 툭 떨어진다.안계평야, 이 들녘이 농부들의 생명의 원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겨울이 오기 전 마늘과 보리를 심었다가 이른 봄 수확한 후 모내기를 하고 애지중지 키운 나락을 가을에 수확하면서 평생을 살아 온 우리들의 아버지, 농부들의 삶을 말이다.
◆안계평야
'쌀'은 생명이었다.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농사는 삶을 지탱하게 한 세상사의 기본, 농자지천하대본(農者之天下大本)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추수가 끝난 들판 곳곳에 세워진 볏짚더미 사이에서 뛰어놀던 술래놀이가 생각났다. 여긴 유년의 '술래길'이었다. 그것이 의성의 농경문화이기도 했고 24절기를 따라 각기 다른 놀이를 하던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었다.
농부와 농부의 아들들의 기억이 함께 살아 숨 쉬는 평야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술래길은 술의 길이기도 했고 함께 나눠먹던 음식의 길이기도 했다. 안계평야를 휘감아 도는 위천과 개천지 그리고 대제지 등 천혜의 자연과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 낸 평야는 술래길을 만들어냈다. 한 켠에선 나락을 베면서 추수를 했고 다른 한 켠에선 농주(農酒) 막걸리와 의성마늘 가득 버무린 안주로 입가심을 하면서 힘을 내곤 했다.
'음식은 기억의 소산이다.' 할머니의 손맛이 엄마에게 전해지고 손맛을 기억해 낸 우리는 어느새 할머니가 되고 엄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주고 있다. 할머니의 김치는 엄마표 김치이기도 하고 서울로 간 우리는 때마다 보내주던 '곰삭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묵은 지는 여기선 '짠지'라고도 불렀다. 짠맛 때문이 아니라 속 깊은 맛이 잔뜩 배어있다는 의미의 경상도식 표현이다.
◆의성음식
흔히들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그건 단연코 잘못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맛없는 음식만 먹고 사는 '음식문화가 빈곤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해산물이 풍부한 전라도 밥상에 비해서는 가짓수가 부족하고 다양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의성은 이웃한 안동·예천과 음식문화가 별반 차이가 없다. '슴슴하고 싱거우면서 담백한' 맛이 특징이기도 하지만 서울된장에 비해서는 아주 짠 맛이 강한 된장찌개를 선호하고 허세를 부리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고유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음식이 의성음식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것이 의성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의성 김 씨 등 이 지역의 반가(班家)의 문화일 것이다. 한겨울 동치미 한 그릇에 시레기를 콩가루에 버무려 무를 썰어 넣은 기가 막힌 시레기국은 여기서만 맛볼 수 있다.
◆술래길축제
의성엔 '술래길'이 있다. 우리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술의 길이자 술래의 길이다.<술래길 작은 양조장축제>는 술래가 되기도 하고 '술 익는 마을'을 찾아나서는 이색적인 축제였다. 술도가 즉 '양조장'들의 '술리마켓'과 맥주축제가 펼쳐지는 와중에 '안주대첩'이 벌어지고 전통주 시음까지 이뤄진 한바탕의 난장이었다.
우리의 술은 쌀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의 소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마을마다 양조장 한 두 곳은 있었다. 집집마다 술을 빚는 '가양주'문화도 있었다. 가문에 따라 술을 빚는 종부의 손맛에 따라 술맛이 다른 것이 가양주의 전통이었다. 그런 주조문화가 세월에 따라 희미해지긴 했지만 의성에 다시 청년 양조인들이 속속 들어와 술을 빚기 시작했다. '이웃사촌마을'을 통해 의성에 돌아온 청년들도 있다.
의성군이 경기도에서 하던 '전국가양주대회'를 유치, 농경문화와 함께 하는 가양주를 보급하려던 시도도 주효했다. 몇 년 사이에 의성은 '술을 빚고, 술이 익는' 마을로 탈바꿈하면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전통주와 막걸리는 물론, 의성의 시그니처로 자부하는 마늘을 활용한 마늘주, 안계평야를 닮은 수제맥주까지 빚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술에 꼭 들어맞는 '마늘닭'과 '마늘오리', 마늘닭똥집에 마늘돈까스, 마늘파스타까지 의성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술을 만드는 양조인들이 모인 '술래길 협동조합'도 만들어졌다. 술 빚는 의성의 인프라가 완벽하게 갖춰진 셈이다.
지난 25일 <안계행복플랫폼>에서 열린 <술래길 작은 양조장축제>는 농경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의성의 양조문화를 공공연하게 즐기는 '술장'이었다. 안계에 자리잡은 작은 수제맥주공방 '호피홀리데이'는 안계평야에 이어 '안계랩소디'라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에일맥주(4.8%)를 선보였다.
경북 3대 평야의 하나인 안계평야에 불어오는 바람을 담은, '안계쌀'과 홉으로 만들어 의성의 숨결이 가득 담긴 한정판 수제맥주를 선보였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 것'이라는 원칙에 충실한 브루잉(brewing)인 셈이다.
호피 홀리데이 외에도 이번 양조장축제에는 의성에서 무원칙주의(의성읍) ▷한담양조장(단촌) ▷의성술도가(금성) ▷선창양조장(구천) 등은 물론 서울 등 외지의 양조인들도 다수 참여했다.
◆다양한 의성마늘요리
의성에 이웃한 안동이 안동국시나 간고등어 같은 지리적표시를 앞세운 음식문화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의성을 대표하는 음식 코드는 '마늘' 에 대한 자존심으로 강하다. 의성마늘 하나 만으로도 의성음식을 내세울 수 있을 것 같다. 국수라면 탑리시장 한 켠 <논산칼국수>가 늘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고 의성마늘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가 즐비하다.
의성읍 전통시장에는 '식당가'가 형성될 정도로 유명한 '할매닭발'이 있다. 의성읍내 자리한 '용주밥상'은 의성마늘을 활용한 마늘닭(순살), 마늘닭갈비, 마늘오리불고기 등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굳이 마늘을 선호하지 않더라도 용주밥상에서 매일 달리 내놓는 오찬은 누구나 군말 없이 사랑하는 메뉴다.
청년 셰프가 만드는 안계의 달빛 레스토랑에선 마늘파스타인 '의성마늘 알리오올리오'와 '의성마늘돈까스'를 꼭 먹어야 한다. 알싸한 의성마늘의 쌉쌀한 향기와 파스타면이 얼마나 환상적으로 잘 어울리는 지 확인해야만 한다. 파스타 속에 숨겨져 있는 마늘슬라이스는 이곳이 의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마늘돈까스에서 마늘냄새나 마늘을 찾아내는 것은 숨은그림찾기다. 안계의 청년창업 푸드빌리지에 위치한 '산들물'의 마늘보쌈과 해물파스타도 추천메뉴다. 용주밥상 인근 '정원레스토랑'의 '마늘돈까스' 도 알싸한 맛을 비교해볼만하다.
여행의 맛은 식도락이다. 의성으로 떠난다면 안계평야를 바라보면서 안계랩소디를 음미하면서 평야를 가로질러 온 바람의 기억을 느껴보자. 마늘향이 얼마나 여행의 맛을 되새기게 하는 지도 깨닫게 되지 않을까. 돌아갈 때는 의성 마늘시장에 가서 진짜 의성마늘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자.
서명수 객원논설위원 diderot@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