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의 동아시아 신화에서 역사로] 동이족이 만든 표의문자 한자와 표음문자 한글

입력 2025-10-21 0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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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새·짐승 무늬 그림…갑골문자 거쳐 한자로 발전

도존 새긴 태양 그림문자.
도존 새긴 태양 그림문자.
용산문화 문자와 갑골문자.
용산문화 문자와 갑골문자.

◆동이족들은 언제부터 문자를 만들었을까?

인류가 만든 문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수메르인이 서기전 3천500경에 사용하기 시작한 쐐기문자로 알려져 있다. 문자는 신이 내린 수수께끼를 풀려는 의지에서 만들어졌는데, 그 수수께끼란 바로 하늘의 별이다. 옛사람들은 하늘의 별 모양을 신이 인간에게 전하는 말로 여겼다. 신의 뜻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별모양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곧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동이족들은 언제부터 문자를 만들었을까? 당나라 시대 역사가인 사마정(司馬貞·679~732)은 '삼황본기'(三皇本記)에서 태호(太皞)씨가 문자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태호씨는) 성인의 거룩한 덕이 있었다. 우러러 하늘의 상(象·모양)을 관찰하고, 구부려 땅의 법을 관찰하고, 널리 새와 짐승의 문(文·무늬)를 관찰하여, 땅과 더불어 알맞게 하였다. 가까이는 자신에게서 상을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상을 취하여 비로소 팔괘를 만들어 신명(神明)의 덕에 통함으로써, 이로써 만물의 정(情)을 분류하였다. 서계(書契·사물을 표시하는 부호)를 만들어 결승(結繩·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뜻을 통하게 하는 것)의 정치를 대신하였다.

중국 고대제왕은 삼황오제(三皇五帝)로 시작한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지을 때 삼황을 지우고 오제의 첫 임금인 황제부터 서술했지만, 삼황에 대한 기록은 여러 서적에 기록되어 있다. 전한 초기의 학자로서 공자의 12세손이라는 공안국(孔安國)이 쓴 '상서 서(序)'와 후한말 서진 초의 학자 황보밀(皇甫謐·215~282)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 손씨(孫氏)가 주석한 '세본'(世本)은 오제 전에 복희, 신농, 황제의 삼황이 있었다고 썼다. 중국 후한 시대 반고(班固) 등의 학자들이 편찬한 '백호통'(白虎通)에는 복희, 신농, 축융(祝融)을 삼황이라고 했다. 사마정은 사마천이 삼황을 삭제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태호(복희), 여와(女媧), 신농을 삼황으로 삼아 '사기'에 '삼황본기'를 추가한 것이다. 삼황은 사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복희와 신농은 공통적으로 들어가고 황제 또는 축융 혹은 여와가 포함되기도 한다. 그런데 삼황은 모두 동이족이기에 사마천이 의도적으로 지운 것인데, 사마정은 이를 모르고 「삼황본기」를 추가한 것이다. 복희를 비롯해서 삼황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신농, 황제, 축융, 여와는 모두 동이족이다.

◆복희와 창힐이 만든 문자는 같았을까?

사마정은 삼황 중 첫 임금인 태호(복희)씨가 하늘과 땅, 새와 짐승 등의 무늬를 관찰해서 문자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복희씨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여덟가지 상(像)으로 나타낸 팔괘(八卦)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복희씨는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무늬를 숫자로 바꾸어 팔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팔괘는 우주 만물을 포함하고 있어서 비로소,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자 창조설의 주인공은 황제(黃帝)의 신하 창힐(倉頡)이다. 후한의 허신(許愼)은 서기 1~2세기 때 인물로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편찬했는데, '설문해자' 서(敍)에서 허신은 "황제의 사관(史官)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창힐은 새가 남긴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글자는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황제 때 사관이 만들었으므로 역사를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도자기에 새긴 부호의 의미는?

중국 중원지역의 유명한 앙소문화(仰韶文化·서기전 5천년~ 서기전 2천700년)도 황하중류가 중심인데 동이족 유적이다. 그 중 하나인 반파유지(半坡遺址·서기전 4천700년~서기전 4천년)에서는 24종류의 부호가, 강채유지(姜寨遺址·서기전 4천700년~서기전 2천년)에서는 18종류의 부호가 토기 표면에 새겨졌는데, 새김의 위치나 내용이 매우 규칙적이다. 현대의 낙관처럼 검은색 테두리에 새겨져 있는데, 토기를 만든 이의 표식이거나 소유자의 표식일 가능성도 있지만, 원시 문자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도상문자.
도상문자.

북신문화를 계승한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서기전 4천300년~서기전 2천600년)는 고대 동이족들의 근거지였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에 있는데, 그 무덤 시신 발치에 묻어둔 도존(陶尊)에서도 그림문자들이 발견된다. 도존 그림문자의 종류는 도상문자(사진)와 같다. 이 중 몇 개만 살펴보자. ①의 그림문자는 둥근 해가 산 위로 떠오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길림대 고문자학자 우성오(于省吾)는 이 문자를 단(旦·해 돋을 무렵 단)자로 풀이 했다. 그런데 시신의 발밑에 묻힌 도존에 새겼다면,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림문자는 시신의 눈 높이에 오도록 도존을 묻어서 시신이 눈을 떴을 때 마주 보게 했다. 그렇다면 이 단(旦)자는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산해경'에서는 새가 태양을 지고 나른다고 여겼는데, 새가 시신의 영혼을 태양이 있는 저 하늘로 데려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②의 그림문자는 자금성 박물원 소속의 문자학자인 당란(唐蘭)은 도끼 월(鉞)자로 풀이했다. ③의 도끼 부(斧) 혹은 도끼 근(斤)과는 도끼에 구멍이 있나 없나로 구별한다. 월은 신성과 권력을 상징한다. 순임금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고대 부족인 삼묘(三苗)가 침입했을 때 월을 들고 춤을 췄는데, 그들이 물러났다. 따라서 월(鉞)자는 귀신이나 잡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 줄 터이니 편히 잠들라는 뜻일 것이다. 대문구문화의 그림문자는 역시 동이족 문화인 용산문화(龍山文化·서기전 2천500년~서기전 1천900년)에서 계승해서 각종 기호로 토기, 옥기, 골기 등에 새겨졌다가 동이족 국가인 상(商)나라 때에는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처럼 본격적인 한자(漢字)로 발전되었다.

◆홍산문화 옥인장에 새겨진 부호

중국 내몽골 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서기전 4천500년~서기전 3천년)는 동이족 유적으로 유명한데, 그 옥저룡에서도 부호가 새겨져 있다. 중국 내몽골 오한기(敖漢旗)에서 동북쪽 나만기(奈曼旗)에서는 2개의 옥인장이 발견되었다. 옥인장에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는데 빨간 인주를 쓴 흔적이 남아 있다. 옥인장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국 옥기 최고 전문가인 손수도(孫守道)는 옥인장이 홍산의 옥저룡과 옥조(玉鳥)와 옥벽(玉璧)과 같이 있었고, 출처와 시대가 명확하다고 했다. 손수도는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을 발견하고 그 발굴에 참여한 학자로서 중국에서 그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옥기의 시대적 문화 귀속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홍산문화 옥기를 식별했다. 그래서 1992년 국가 우수 특별수당 전문가로 선정되었다.

옥인장에 관해서 유추해볼 수 있는 글이 있는데, 한나라 정치이념을 유교로 세운 동중서(董仲舒)가 '춘추'(春秋)에 주석을 달아 쓴 '춘추운두추'(春秋運斗樞)이다. 동중서는 "황제 시대에 황룡이 그림을 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 옥새가 있었다"라고 했다.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기호가 새겨진 옥저룡과 황제시대의 옥새가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에 문자 체계가 있었다

홍산문화를 계승한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서기전 3천년~서기전 2천년)에서 그림문자 및 기호가 새겨진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고조선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서기전 2천년~ 서기전 1천400년) 에서는 갑골문과 금문에서 사용된 것과 똑같은 기(其)자가 출토 되었고, 뜰을 뜻하는 저(宁)자와 담장을 뜻하는 용(墉)자의 원형자가 출토되었다. 고조선 시대에 이미 문자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자는 신석기 시대 동이족이 만든 그림문자에서 청동기시대 상나라에서 신의 뜻을 물어보는 갑골문자로 이어졌다가 한자로 발전했는데 대표적인 표의문자다. 10월 9일은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을 기념하는 한글날이다.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표음문자(소리문자)이다. 우리 동이족 선조들이 뜻문자 한자와 소리문자 훈민정음을 모두 창조한 것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