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희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수석연구원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잔혹했다. 영화 범죄도시4가 온라인 불법도박과 해외 거점을 잇는 범죄 생태계를 그리며 천만 관객을 모으는 동안, 캄보디아에서는 실제 한국인들이 감금과 폭행, 심지어 살인의 피해자가 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정부는 뒤늦게 특별여행경보를 발령하고 일부 지역의 입국을 제한했지만, 이런 '사후적 조치'로는 다음 희생을 막기 어렵다. 이제는 대응 철학부터 제도적 장치까지, 국가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다시 짜야 할 시점이다.
영화 속 이야기라고 해서 모두 허구는 아니다. 필리핀을 무대로 한 납치·폭행·도박 자금의 연결고리는 실제 동남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축소판이다. 팬데믹 이후 문을 닫은 카지노와 리조트가 불법 온라인 사기와 도박의 거점으로 바뀌면서, 이른바 '스캠 단지(Scam Compound)'가 산업처럼 확산됐다.
현지인 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청년들이 '고수익 해외 일자리' 광고에 속아 현지로 향했고, 여권을 빼앗긴 채 감금과 폭행, 협박 속에서 범죄에 동원됐다. 이 비극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국가의 경고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결과다.
정부는 10월 중순 이후 캄보디아의 뽀이펫, 바벳, 깜폿 보코르 등 일부 지역을 사실상 여행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단속을 벌였다. 하지만 구조된 60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가담 여부'를 이유로 다시 수사선상에 올랐다. 구조와 처벌이 같은 비행기 안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현실은 우리 대응 체계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실종자만 수십 명에 이른다는 보도는 사태의 근원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해준다.
문제의 핵심은 사전 예방의 부재다. 해외 불법채용과 온라인 도박 리크루팅이 국내 플랫폼에서 장기간 활동을 했지만, 정부는 자율규제 수준에 머물렀다. 위험 신호가 감지됐음에도 여행경보 상향은 사건이 터진 뒤에야 이뤄졌다. 경보가 '예방'이 아닌 '통보'로 변한 셈이다. 구조·수사·외교가 따로 움직이며 피해자 가족들은 여러 기관을 전전해야 했다.
더 근본적인 한계는 상류 구조에 대한 제재 부재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캄보디아의 재벌과 범죄 네트워크를 제재 명단에 올려 자금줄을 차단했지만, 한국은 아직 그런 틀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 결과 범죄의 공급망은 여전히 유지되고, 피해는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경보가 아니라 시스템 중심의 대응으로 전환해야 한다. 사후 수습이 아닌, 예방·대응·회복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통합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해외 불법채용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세워야 한다. 정부와 주요 플랫폼이 협력해 불법 구인·모집 글을 신속히 차단하고, 해외 일자리 공고에는 사업자 실명과 현지 등록증, 노무허가증을 의무화해야 한다.
위반 시 즉시 퇴출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더불어 출국 단계에서는 AI 기반 위험탐지 시스템을 도입해 고위험 지역·직종·항공권 패턴을 자동 분석하고, 실시간 경고와 상담을 제공해야 한다. 단순 안내를 넘어, 필요 시 출국 보류나 현장 대응이 가능한 예방 장치로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외교부·경찰청·고용부·복지부가 함께 운영하는 국민구조 통합지휘본부를 상시화해야 한다. 신고부터 귀국 후 회복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의 체계로 관리하고, 피해자는 보호하며 가담자는 엄정히 수사하는 '투트랙 체계'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금융 공조망을 강화해 가상자산 거래소와 결제망의 자금 흐름을 실시간 추적하고, 불법도박·사기 사이트 정보를 금융권과 공유해야 한다. 동시에 청년층·전역 장병·구직자 대상 예방 교육을 정례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해외 강제노동과 감금, 대규모 온라인 사기에 연루된 기업과 개인을 제재할 한국판 인권제재법 제정이 필요하다. 비자 발급 제한, 자산·거래 동결 등 실질적 제재를 시행하고, 현지 정부와 협력해 합동수사와 압수수색이 가능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영화 범죄도시4는 통쾌한 일망타진으로 막을 내리지만, 현실의 결말은 훨씬 더 느리고 고된 과정 속에서 바뀐다. 플랫폼 규제, 자금 추적, 외교 공조, 피해자 회복 같은 지루한 장면 하나하나가 진짜 변화를 만든다. 국가는 국민을 위험에서 멀어지게 하는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 다음 희생을 막는 일, 그것은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써 내려가야 할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