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시진핑 6년 만의 회동 주목…'문화 APEC' 내세운 한국, 협력의 틀 복원 도전
미국과 중국의 글로벌 패권 경쟁이 갈수록 격화되는 상황에서 열리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자유무역 확대와 관세, 세계 평화 등 국제 협력의 새로운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냉전이 종식된 약 36년 간 자유무역과 포용 성장을 기치로 아시아·태평양의 공존·공영을 이끌어 온 APEC이 새롭게 마주한 '분열의 시대'에 다시 한번 연대의 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경북 경주를 향하고 있다.
◆냉전을 딛고 태동한 APEC
APEC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21개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에선 올해 의장국인 한국을 비롯해 일본·중국 등 12개국이 회원국이다.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는 미국·캐나다· 멕시코·칠레·페루 등 5개국, 오세아니아에선 호주·뉴질랜드·파푸아뉴기니 등 3개국, 러시아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외에 옵서버(observer, 회의·조직의 정식 구성원은 아니지만 특별히 출석·참여 등이 허용된 기구. 발언권은 있으나 의결권과 발의권은 없음) 기구로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태평양도서국 포럼(PIF), 태평양 경제협력위원회(PECC) 등 3개 기구가 참여한다.
APEC은 1989년 호주에서 창설됐다. 동구 공산권 붕괴로 냉전이 막을 내리던 시기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유럽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 옮겨오면서 역내 국가 간 경제협력과 자유 무역 촉진 등을 위해 태동했다. 한국·미국·일본·호주 등 12개국이 창설 멤버였다. 이후 중국·러시아·베트남·페루 등이 합류했다.
환태평양(環太平洋)에 위치해 있는 APEC 21개 회원국들은 전 세계 인구의 약 40%, 교역량 약 50%, 국내총생산(GDP)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경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의 대외 수출·입 가운데 APEC 회원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74.7%, 67.5%에 달한다. APEC 회원국의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 비중은 46.5%, 반대로 한국이 APEC 회원국에 대한 직접투자 비중은 57.6%다.
APEC의 가장 큰 특징은 의사 결정에 있어서 자발적 협력(voluntary cooperation)과 만장일치(consensus)를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회원국 간 합의가 이뤄져야 의제 채택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국제연합(UN)이나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구속력은 없다.
대신 매년 돌아가면서 의장국이 회의를 주도하고, 연중 200여개의 실무그룹과 기업자문위원회(ABAC), 경제장관회의 등을 통해 구체적 의제를 논의한다. 매년 10월 말~11월 중순 열리는 정상회의는 연중 논의된 의제를 종합해, 결실을 맺는 자리로 여겨진다. 한국은 올해 의장국이며, 직전 의장국은 2024 APEC 정상회의가 열린 페루, 차기 의장국은 중국이다.

◆APEC의 지난 36년은 '협력'의 역사
역대 APEC 정상회의는 세계 경제 질서를 움직인 주요 합의의 무대였다. APEC은 창설 4년 만인 1993년 미국(시애틀)에서 사상 처음으로 회원국 정상들이 참여하는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이듬해 열린 인도네시아 보고르 회의에선 자유롭고 개방적 무역체제 실현을 목표로 하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했다. 보고르 선언은 지금도 APEC의 기본 방향으로 여겨진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부산 선언'은 APEC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부산 APEC 정상회의는 무역·투자 자유화의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했고, 정보통신기술(ICT) 협력과 인적교류 재난대응 체계를 제도화했다.
전 세계를 덮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APEC은 '경제 회복 논의'의 중심 무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10년 일본 요코하마 회의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구상이 공식화됐고, 2017년 베트남 다낭 회의에서는 디지털 경제와 스타트업 생태계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권한 부여(Empower), 포용(Include), 성장(Grow)'을 주제로 페루 리마에서 열린 2024 APEC 정상회의에선 무역·투자 자유화,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 디지털 혁신, 식량 안보 등을 주요 의제로 논의했다. 특히 '마추픽추 선언(Machu Picchu Declaration)'을 채택해 포용적 성장과 녹색 전환을 위한 국제 협력 의지를 재확인했다. 다만 미국과 중국 간 통상 갈등, 환경 규제 수준을 둘러싼 회원국 간 입장 차로 공동성명 채택에 난항을 겪는 등 법적 구속력이 없는 APEC의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다시, 경주에서 협력의 불씨 타오를까?
올해 APEC 정상회의 주요 의제는 '인구구조 변화 대응'과 '인공지능(AI) 협력)'이다. 하지만 주요 의제보다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은 미국-중국 간 첨예한 전략 경쟁이다. 미국은 반도체, AI, 청정에너지 분야를 중심으로 공급망 재편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이에 맞서 최근 희토류와 배터리 핵심소재 수출을 제한하며 맞서고 있다. 특히, APEC 정상회의 개최를 20여일 앞둔 시점에서 중국 정부가 희토류 7종의 수출 허가를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번 정상회의에서 주요하게 다뤄질 것으로 예측됐던 공급망 안정화 등은 제대로 논의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 블록화 현상에서 APEC이 협력의 틀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일본·호주·인도 등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 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와의 연계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반면, 중국과 러시아, 일부 동남아 국가는 탈미(脫美) 경제권 구상으로 맞불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석탄 등 화석 연료 의존도가 높은 동남아 국가들은 탄소중립을 앞세우는 미국 등 APEC 내 선진국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다. 에너지 전환뿐 아니라 인구 고령화, 노동력 이동, 디지털 격차 등 포용성 논의에서도 회원국 간 의견 일치(consensus)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비관적 전망과 비례해, APEC 정상회의에 대한 기대도 크다. 6년 만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만남은 벌써 세계 이목을 끌고 있다. G2 정상들이 정상회담을 통해 심화하고 있는 관세 경쟁 등에서 어느 정도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APEC을 통해 한일 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야당 시절 반일(反日) 성향이 짙었던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등 집권 여당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2차례 정상회담을 갖는 등 한일 관계의 변화가 감지됐다. 하지만 강경 보수 성향인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이 신임 총리로 유력한 상황에서 모처럼 해빙 무드를 맞은 한일 관계의 또 다른 변화가 주목된다.
이외에도 참석이 불투명하기는 하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년 만에 처음으로 서방 정상과 한자리에 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상북도는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가 가진 문화적 상징성과 첨단 기술 인프라를 결합해, 문화·관광·산업이 융합된 '문화 APEC'을 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대통령의 다자외교 무대 데뷔전이기도 한 만큼 정부도 이번 정상회의를 통한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치열한 물밑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이번 회의를 통해 APEC의 협력 정신을 재확인하고, 갈등의 시대에 실질적 해법을 제시하는 '경주 선언'을 목표로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