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말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를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씻나락'은 종자(種子)로 쓰는 볍씨다. 볍씨(씻나락)에서 싹이 트지 않을 때 "귀신이 까먹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농경사회에서 모든 볍씨의 싹이 트지 않아 벼를 키우지 못하면 굶어 죽어야 할 판이 된다. 이처럼 황당하고 참담한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는 있어선 안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4일 한국 관련 A4 용지 2장 분량의 연례 보고서에서 '재정(fiscal)'이라는 용어를 무려 14번이나 사용하면서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한편 향후 고령화와 관련한 지출 압력을 수용하기 위해 장기적인 재정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국가 채무는 올해 말 1천301조9천억원에서 2029년 말 1천788조9천억원으로 4년 사이 40% 가까이 급증할 전망이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1인당 상생지원금 '20만원+10만원+α'에다가, 내년 예산을 역대 가장 큰 폭인 55조원 늘려 역대 최대인 728조원으로 편성한 것도 모자라, 확장 재정 기조를 유지해 터닝 포인트(전환점)를 만들겠다고 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채 규모의 절대액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국채를 발행하면 (GDP 대비) 부채(負債) 비율이 약 50%를 약간 넘는 정도가 될 것인데,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대개 100%가 넘고 있다"고 했다.
IMF가 한국 속담을 알고 있다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경고(警告)했을 만하다. 국제 금융시장과 유럽연합(EU)의 국가 채무 안전 기준은 'GDP 대비 60%'이다. 100%가 넘는 미국(122.5%), 일본(234.9%), 프랑스(116.3%) 등은 모두 기축통화국들이다. 한국과 같은 비기축통화국은 신용 위기가 오면 자국 통화를 찍어 내 빚을 갚을 수 없다. 그 때문에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씻나락만 까먹다 보면 국가부도를 피할 길이 없다.
'IMF' '탄핵'을 먼저 언급한 것은 이 대통령이었다. 최근 외신 인터뷰에서 한미 관세 협상 관련,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 경제는 1997년 IMF 사태에 필적하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동의했다면 내가 탄핵(彈劾)됐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들도 "시한에 쫓긴다고 해서 우리 기업들이 크게 손해를 볼 합의안에 서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얼핏 대단한 결기가 느껴지지만 되돌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는 아닌지 우려스럽다. 지난 7월 말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됐고, 주요국과 비교할 때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이라고 말한 것이 이 대통령 본인이고, 8월 말 한미 정상회담이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회담이었다"고 공식 브리핑한 것이 대통령실 대변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국민을 속여 왔다는 것인지 반문(反問)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기업들이 한미 관세 협상 교착(膠着)으로 고율 관세를 부과받는 엄청난 피해를 받고 있다. "기업들이 크게 손해 볼 합의안에 서명할 수 없다"는 대통령실의 논리적 모순(矛盾)은 설명 불가이다. 한미 관세 협상은 이미 사실상 실패했다. 그 피해를 얼마나 줄이느냐만 남았다. 이재명 정부는 마치 3천500억달러 대미 투자 조건이 문제의 원인인 듯 돌리지만, 애당초 한국 경제 규모로 볼 때 3천5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한 것 자체가 완전 헛소리였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